안시, 프랑스
‘안시’에 갔을 때 나는 그 자그만 프랑스 도시가 꼭 스위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웃기게도 나는 스위스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단지 스위스 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눈 덮인 산과 커다란 호수, 대자연과 같은 이미지들만 머릿속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안시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사실 우연이 아니다. 그 도시는 실제로 스위스와 인접한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해 있고, (당시 숙소가 있던 ‘리옹’보다도 스위스의 ‘제네바’와 지리적으로 더 가까웠다) 알프스 산맥이 걸쳐져 있어 저 멀리에 하얀 산이 보이기도 한다.
리옹에서 기차를 타고 안시에 다다를 때 즈음 산 아래로 기다랗게 구름이 깔린 풍경을 보고 나는 이 도시가 내 프랑스 여행 코스의 완벽한 소르베 (셔벗)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파리에서 니스로, 생선에서 고기 요리로 넘어가기 전의 상큼한 리프레시.
안시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 비해 온도가 더 낮았다. (이 날만 그런걸 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는 겉옷 한 장으로도 돌아다니기 충분했지만, 이 곳에 오니 제법 쌀쌀한 날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뜨끈한 국물이 딱 생각나는 그런 날씨. 마침 도착 전에 부랴부랴 살펴본 여행 정보 앱에서 일본 라멘 집을 찾아냈고, (무려 지역 내 최상위 랭킹 맛집) 나는 주저 없이 이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다.
관광지로부터 지역 주민들이 사는 외곽 지역 쪽으로 좀 걷다 보면 나오는 이 아담한 라멘집은 웨이팅이 있을 만큼 인기가 많았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이때 먹은 라멘은 프랑스 여행에서 가히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추운 날씨도 한몫 했지만, 이 곳에 오기 전 파리와 리옹에서 연거푸 양식만 먹은 탓에 개운한 국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라면 국물과 맥주를 한 입 하니, 온몸을 감싸던 냉기가 가라앉고, 위에 남아있던 느끼함이 삭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배를 채운 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안시는 작은 동네라 사실 볼거리가 많거나 하지는 않다. 구시가지와 안시 호수가 거의 전부라 할 만큼. 하지만 이 곳은 분명, 파리나 니스 같은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프랑스의 또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고, 굳이 찾아갈 가치가 있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나도 당일치기 여행으로 다녀오긴 했지만, 더 머물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다.
젤라또 하나를 사서 천천히 구시가지를 걷다 보니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아기자기한 풍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마을은 안시 호수로 연결되는 작은 운하를 품고 있어 사뭇 이탈리아의 베네치아가 연상되기도 했다. 파스텔 톤 집들로 둘러싸인 물길 위에 백조가 유유히 헤엄치고, 그 뒤로 커다란 산이 드러난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이었다. 이런 장관을 보고 있자면 엽서에 나오는 사진이 실재하긴 하는구나 생각이 든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구시가지 근처의 ‘안시 성’을 들려보는 것도 좋다. 당일치기 여행자인 나에게는 결국 호수를 볼 시간을 줄어들게 한 곳이 되었지만, 안시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거나,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스팟이다. 옛날에 성이었던 곳을 외관은 그대로 보존한 채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고,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품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무엇보다 성의 꼭대기 층에서 붉은 지붕의 안시 마을과 호수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다.
다시 구시가지를 지나 안시 호수에 다다르면, 호수 초입에 ‘사랑의 다리’가 놓여 있는 바세 운하를 마주치게 된다. 이 곳도 하나의 포토 스팟으로, 내가 갔던 시기는 10월 초라 운하 양 옆으로 단풍으로 물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랑의 다리는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둘이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귀여운 설화를 갖고 있다. 사실 이 곳의 풍경을 함께 눈에 담고 있으면 로맨틱한 감성이 절로 샘솟을 것 같긴 하다.
안시 호수는 프랑스에서 세 번째로 가장 큰 호수이자, 유럽에서도 가장 깨끗한 호수로 알려져 있다. 저 멀리 알프스 산맥이 보이는 안시 호수는 명성대로 아름다웠고, 물도 맑았다. 프랑스에서 커다란 도시 여행만 하다가 이렇게 뻥 뚫린 호수를 보자니 다른 세상에 온 듯 새로웠고, 바로 옆 나라인 스위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얼마간 잔잔한 호수의 경치를 즐기니 어느덧 돌아가는 열차 시간이 되었다. 이 때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시간도 지나 놓고 보니 짧게만 느껴지고, 이 호수를, 이 마을을 온전히 다 담기 위해서는 최소한 1박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에 다시 가게 된다면, 나는 아마 파리보다도 안시에 먼저 가고 싶을 것 같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에게 안시는 그만큼 파리보다도 매력적이고, 또 다른 계절이 궁금한 도시다. 다음엔 여름, 최소한 1박 이상 머무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며 안시의 뜨거움도 느껴보고 싶고, 자전거를 대여해서 안시 호수와 마을을 구석구석 더 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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