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頭陀)는 세속의 번뇌를 버린다는 뜻으로 산스크리트어 음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의식주집착을 버린 수행을 가리킵니다. 두타연은 신라 천년 고찰이었던 두타사에서 비롯된 연못이라고 하겠지요. 폭포와 연못을 가까이 둔 보덕굴은 저절로 해탈할 것 같은 멋진 곳이지요. 천년이 흐른 시점의 우리는 세속의 번뇌를 잊고자 하나 70여 년 전 6.25 전쟁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들을 생각하면 번뇌가 요동을 치고 있습니다.
중동지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태로 5차 중동전쟁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지난주 안식일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했지요. 꼭 일주일 전 토요일 안식일에 하마스의 5000 발 로켓 포탄에 이스라엘의 방공망 아이언돔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기습공격 후 가자지구의 통문과 땅굴로 이스라엘 민간인이 수백 명이 인질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해 스탈린과 중국의 전쟁개입동의를 받아내고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벌이던 6.25 전야가 떠오릅니다. 로켓 미사일뿐만 아니라 현대전에서는 하늘에 떠 카메라로 조준 공격해 오는 무인 소형 드론이 더 무섭습니다. 가자지구 공습이 계속되고 사망자만 5천 명 어린이도 2천 명이 넘었다. "I will not die" 생이별을 대비해 부모들이 그들의 아이들 몸에 이름을 적을 때 아이들이 한 말이다.
2차 대전 후에도 사회주의권 통치자의 생각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이 철수한 한반도를 분할점령, 미영중소 4개국이 신탁통치하겠다던 시기였지요. 반탁 데모와 유엔의 남북한 총선거를 거부하였습니다. 1949. 3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한침공 승인과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3개월 뒤인 1949. 6월경 미군철수 중공군국가수립 소련원자폭탄성공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6.25 전쟁 개입 조건을 붙여 김일성의 무력통일구상을 승인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 1950. 5월에 북한의 지상군 확충(중국군출신 한인 5만, 소련제 무기)이 침공의 전조였습니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해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마저 6월 23일 24시 해제되어 병력 1/3 이상이 외출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이 새벽에 3.8선 전역에서 11만 1천 명으로 기습했습니다.
초기대응에서도 영국신사를 자처하는 신성모국방장관은 휴일전화로는 불통이었는지, 존 무초 대사의 '전면적인 남침'은 7시간 26분 만에 에치슨 국무에게 보고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트루먼 미 대통령의 정확한 세계정세 판단에 따른 맥아더장군의 시찰보고서(6.30)로 미지상군이 투입되었지만(1950. 7. 5 스미스부대 오산전투) 대패했습니다. 딘 소장이 포로가 되기도 했고, 낙동강 전선 학도병의 장사리 전투 와중에 50.9.15 인천상륙작전(7.5만 병력투입)으로 서울은 수복되었지만, 열강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북한 진군은 멈춰야 했습니다.
50.10.1 유엔군의 38선 통과허가 (국경지대에는 한국군만 파견하라는 투르먼의 지시묵살) 후 10.19 중공군 20만이 압록강을 넘었습니다. 1951. 1. 4 후퇴 이후 교착상태에서 소련대사 말리크의 휴전제안으로 51.7.10 휴전회담이 시작은 되었지만, 포로자유송환과 자동송환의 입장차로 중단된 채 장기화되면서 양구 일대 고지전투는 더욱 치열했습니다. 양구 조각공원에서 1951. 6월부터 휴전조인까지의 9개의 전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계정세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즉 53.3 스탈린사망, 아이젠하워의 6.25 종전 선거공약등으로 53.4.16 휴전회담이 재개되었습니다. 이어 7월 22일 군사분계선이확정되고 판문점에서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저희 협회도 지난 7월 휴전협정 70주년 행사에 맞추어 DMZ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하마스대원이 3만여 명이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237만 명에 대해 75년째 국제사회에서 이, 팔 분쟁에 성토만 할 뿐입니다. 75년째 유엔의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는 양국을 지지한다며 인도적 지원을 호소할 뿐입니다. 주권과 국가를 지키는 일은 목숨을 바쳐야만 겨우 그것도 누군가의 도움이 더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역사를 잊지 않고 대비를 하고 후대에도 알리는 등 방심할 틈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마스의 기습은 70여 년 전 6.25 전쟁처럼 같은 방식으로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철원 6사단에서 군복무할 때 생각이 납니다. 민통선내 GOP를 3개 연대가 매년 교대로 철책근무를 맡게 됩니다. 정보작전 스태프로 고지벙커에서 상황관측보고를 사단본부에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40여 년 전 겨울은 요즘보다 추웠습니다. 종종 한강이 꽁꽁 얼었고 썰매를 타는 모습도 기억합니다. 동계훈련 시에는 진밤색 윤기가 도는 담요 두 장을 배낭 위아래에 돌돌 말아 붙이고 행군합니다. 학(鶴) 저수지 전체가 탱크도 지나갈 만큼 두껍게 얼어있었고 줄지어 행군해 건너던 추억이 있습니다. 저수지 얼음이 갈라지는 자연의 비명 같은 신비의 소리도 아름답던 곳이었지요. 학저수지를 건너 곧 도피안사 절을 지나가는 행군코스인데 글자 그대로 피안에 이를 수 있는 느낌도 들었지요.
DMZ를 걷는 이유 중의 하나는 철원평야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지요. 강원도 쪽 높은 산을 바라볼 때마다 훈련소를 떠날 당시 인제 원통지역에 배치되는 동기들에게는 위로를 보내곤 했답니다. 해발고도가 높은 고지를 매일 식수조달을 위해서도 오르내리는 일이 일상의 큰 일이었으니까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다'는 농담이 있을 만큼 외진 곳이었지요.
화천댐으로 길이 막힌 비수구미를 돌아 평화의 댐에 올라 파로호를 바라보니 6.25 전쟁의 본거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대붕호(大鵬湖)로 불렸던 파로호(破虜湖)도 중국 오랑캐를 격파한 곳을 기념하며 이승만대통령 때 지은 이름입니다.
평화의 댐 남쪽 하류
휴전 중 증축으로 댐의 높이를 키워 거대해진 평화의 댐에서 파로호를 내려다봅니다. 곧 휴전협정이 조인된다면서도 화천댐 공방을 벌인 막바지 전투는 그곳에서 죽기로 작정한 일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시체만 24,000구. 파로호에는 '시체반 물반'이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군복무시절 민통선내 GOP근무를 위해 철원 북쪽 토교저수지를 상류에서 건너가던 때였습니다. 산란기의 물고기들이 굴곡진 여울에서 숨을 고르는지 모여있어 철모를 벗어 물고기를 퍼 담았습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반'이었습니다. 물고기들의 산란을 위한 본능의 힘을 느꼈지요. 다시 놓아주었지만 알을 낳으려는 일념뿐, 물고기들은 상류로 가야 했습니다. '시체반 물반'은 듣기 거북했습니다. 과장법으로 사용한 말이긴 하겠지만 애초에 없던 말이었습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노랫말의 비목공원을 뒤로하고 10월부터는 양구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만 비목의 빈 철모만 덩그러니 현장을 바라보며 위령제 헌화를 할 때마다 숙연해지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00여 년 전 쓴 짧은 시입니다.
기억 속의 양구는 괴로웠던지 양구 이곳저곳 '청년 양구'라는 슬로건이 눈에 띕니다. 영화배우 소지섭이 10여 년 전 포토에세이를 출판했군요. 파로호 둘레길에 '소지섭길'이라고 이름을 붙여 홍보하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꿈꾸고 가꾸는 '청년 양구!' 1 급수 어종인 열목어의 최대서식지인 만큼 물도 맑은 곳입니다. 맑은 물과 청정한 공기는 10년은 젊어지게 할 것도 같습니다.
과거를 뒤로하고 천년 고찰 두타사가 있었던 두타연으로 향합니다. 코로나19로 2022.4.1 재개장한 곳인데 민통선내에 있고 특히 오늘은 비득검문소를 통과하여 두타연을 거꾸로 걷습니다.
파로호와 습지공원 내에서 인공섬인 한반도섬에서 발대식을 갖고 출발해 파로호 둘레길인 소지섭길을 따라 인문학박물관을 지나 마침 군민축제가 열리고 있는 종합운동장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식사 후 곧 승차해서 오후 1시에는 비득검문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GPS목걸이 대신 비득검문소에서 군 선도 차량의 호위하에 제2코스를 관광합니다. DMZ생태 환경단체로서 군당국의 허락을 받고 엑스밴드(X-band) 조끼를 입고 에스코트를 받는 운 좋은 날입니다. 3시간 정도 걷게 됩니다. 통상의 관광코스는 금강산 가는 길 안내소에서 GPS목걸이를 차고 13시 차량이동 두타연 안내소를 통해 양구전투위령비 조각공원으로 가는 제1코스(양구군청에서 관리)입니다.
양구수목원(대암산 자락에 있으며, 람사르협약에 따른 국내 최초의 습지이다. 용늪 산양 북방식물 고산성습지로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곳). 박수근미술관(앉아있는 두 남자와 드로잉 2002)에는 대표작인 빨래터가 벽화로 재현되어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알려진다. 나무와 두 여인, 시장, 절구질하는 여인 등 서민적 풍경이 유명하다. 이해인 시문학관의 2층에는 김형석 안병욱 철학의 집도 함께 볼 수 있다. 오래전 신문칼럼에서 만난 안병욱의 인생관(생즉도 생즉학 생즉수 생즉동 : 자기 길을 간다는 것이요, 배우는 일, 갈고닦는 일, 가치창조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인생이 "운명과 자유의 조우"라고 역설 자유란 칼과 같아. 잘 써야 손을 베지 않듯 도덕과 양심, 정의가 있는 자유를 구가해야 한다)을 상기할 수 있다. 국토정중앙천문대(2007.80cm 반사망원경 중앙로 기네스 4*2m 양구일부 20배 해시계 영침 4.3kg 순금으로 제작) 등 보고 싶은 곳이지만, 오늘의 걷기 코스에서는 건너뛰어야 해서 아쉽습니다.
금강산여행객의 필수코스인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31번 국도 중 전쟁 전 그대로인 길이지요. 통문 4km 삼대교 통문 2.7km을 지나면 금강산까지 24km, 6Km 더 가면 내금강에 설 수 있습니다. 우리 산수화표현인 진경산수 화풍으로 유명한 인왕제색도 금강전도를 그린 겸재정선(1676~1759 미술관 2009.4월 가양동)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11회 차 코스에서 만나게 될 펀치볼을 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양구베스트 10중 첫 번째), 3위 파로호 꽃섬 4위 양구수목원 5위 박수근 미술관 6위 백자박물관 7위 제4땅굴 8위 두타연 9위 상무룡 출렁다리 10위 해안 야생화 공원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양구의 먹거리로는 오골계숯불구이 촌두부전골 광치막국수 펀치볼의 시래기도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양구전투 위령비와 시신소각소 항아리조형물 조각공원에서 9개 전투설명(크리스마스고지 전투 51.12/25~28 30일간 잠정 군사분계선에 중공군 기습 사수한 곳. 피의 능선 전투 51.8.16~9.5 19일간. 펀치볼 전투 51.8.31~9.20 21일간 미 해병 1사단 북한군 1사단 1579:4506명. 백석산 전투 51.8.18~10.28 72일간 분계선결정. 도솔산 전투 51.6.4~6.20 17일간 618:3307명. 단장의 능선 전투 51.913~10.13 31일간 미 10군단 프랑스 네덜란드 대대 3745(597 전사 3046 부상 84 실종):10488(사살 1473 추정사살 8389 포로 606). 가칠봉 전투 51.9.4~10.14 40일간. 대우산 전투 51.7.8~7.31 24일간. 949 고지 전투 51.11.17~18 2일간)을 관람하게 됩니다.
두타사 절터 인근 정자에서 두타연을 조망합니다. 폭포와 연못사이 보덕굴에 앉아있는 문수보살이 '네가 찾는 보살과 함께 3년을 살았어도 못 알아보는 게냐'라는 만화로 만든 안내판을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짙푸른 심연은 깊이가 12m나 됩니다. 1mm씩 매년 패이는 폭포바위에서 내려오는 흰 물보라가 아름답습니다. 양구전투위령비에서 헌화한 후 두타연갤러리 이목정 두타연 팔랑리까지 10코스 두타연길 21.5km 구간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