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인 김내동박사 해설을 들으며 걸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을 제대로 설명을 듣는 계기가 되었다. 산성중앙광장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남문으로 향했다.안내서를 보면서 걸으니 전체 개요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편액을 정조가 하사했다. 남한산성 북한산성 수원화성이 100년 간격으로 축조되었다. 북방의 외침(外侵)이 늘 근심거리였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 때의 토성으로부터 유래된 남한산성은 2년 만에 축성된 행궁인데 승려에게 도성출입증을 내주며 빠른 축조가 가능했다. 지금도 성내에 사찰이 여럿 있고. 한용운의 만해기념관도 있다. 4 대문을포함하여,암문(暗門)과 시신을 옮기는 시구문까지 22개의 많은 성문으로 성 안팎의 소통을 고려했다.
수어장대로 향했다, 동남쪽 견고한 성을 축조한 이 회 장군이 공금횡령으로 처형되어 축성자금을 모아 오던 부인과 첩마저 한강에 투신하였고 처첩의 초상도 있다는 청량당이 애석하다. 처형되면서 매가 나타나면 자신이 무죄임을 알 것이라 했던 기氣가 모인 곳이 매바위다. 독도는 수심 2km를 뻗어올라 해발 168.5m인 것처럼, 땅속 깊이 뿌리를 둔 매바위는 기를 받으려는 손길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있다.
청나라 팔기군은 음력 11월 압록강에서 일주일 만에 한양에 다다르니 파발보다 빨랐고, 피난처인 강화도길도 막혀 인조는 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온 산을 덮고 있었다. 석 씨 성을 가진 이가 왕을 등에 업고 산을 올랐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었다고 했다. 선물로 어의(御衣)를 받아 어이없다고 해설자가 농을 친다. 임금이 47일 만에 항복하러 나갔던 서쪽문을 나가면서 사진을 찍는 데 역사의 현장에 있는 듯 비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