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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May 28. 2024

각자에게는 각자의 생존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 서현)(2/3)

https://blog.naver.com/pyowa/223460832711


시간이 넘치고 넘쳤던 어느 날, 대학도서관에 갔었다. 최순우 전집을 꺼내 읽었다. 5권으로 되어 있는데, 도자기, 공예, 조각, 건축, 회화 등 주제별로 책을 묶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베스트셀러는 5권 전집에서 대중성이 있는 글을 모아 묶은 선집이다.


배흘림 기둥이란 말도 처음 들었다. 일자 기둥이 가운데 홀쭉해 보이기 때문에 배흘림기둥을 세웠다고 했다. 그런데 일자 기둥을 가만히 봐도 여전히 일자로 보였고, 배흘림 기둥은 여전히 배가 불룩해보였다. 곡선의 아름다움도, 팔작지붕의 입체감도 선뜻 이해는 되지 않았다. 


건축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 건축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과 몸을 놀려 건축을 세우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문학도 그렇다. 노동을 멀리서 바라보는 시인은 풍경과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노동을 하는 시인은 밭갈고 돌아올 때 무거워지는 쟁기와 힘이 빠져 안쓰러운 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서현 작가는 배흘림 기둥은 목수의 '미감'이 아니라, '제약의 극복'이었다고 말한다. 기둥은 굵어야 하고, 주초는 미적으로 다듬어야 했고, 다듬고 난 후에도 여전히 넓은 주초는 구하기도 어렵고, 그만큼 비쌌다. 목수는 작은 주초에 기둥을 맞추는 방법으로 제약을 극복했다. 기둥의 밑둥을 깍아내는 것이다. 자연스레 가운데 부분은 볼록하게 되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조선에 이르러 배흘림 기둥이 사라진 이유도 명쾌하게 설명된다. 조선은 주초의 미감을 그리 중하게 생각치 않았다. 조선은 석공의 측면에서는 도태된 시대였다. 조선의 목수는 주초는 건물을 받치면 그뿐이므로, 커다란 돌을 받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주초의 마감은 정교하지 않았다. 주초의 마감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저 돌에 맞추어 나무를 깍아 올릴 때도 있었다. 아마 조선의 목수는 주초의 아름다움에 시긴과 돈을 쓰느니, 지붕이나 단청에 시간과 돈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추녀곡선이나, 처마곡선인 '앙곡'의 곡선도 모서리와 기둥을 보호하기 위한 목수의 절실함의 표현이었다. 앙곡은 태양고도에 따라 곡선을 달리한다. 적도에 가까울수록 처마곡선은 치켜 올라야 하며, 북극에 가까울수록 처마곡선은 평평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앙곡은 북위 38도 근처의 태양고도에 맞춰진 귀납적 결과물이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인간에게 아름다워야 한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어색해선 안 된다.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슨 의미이겠는가. 나라마다 아름다움이 다른 것은 나름의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우리나라의 곡선이 아름다운 이유다. 


최순우 선생과 최순우 전집
연화문 주초와 덤벙주초
경복궁 근정전 추녀곡선과 베트남의 추녀곡선 : 태양고도에 따른 앙곡의 차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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