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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찻잎 따러 내려오는 도시사람들

하동 3부작 - 02. 녹차 만들기

by 노마
차 전문가의 모놀로그

멋들어진 페도라를 쓰고, 고급스럽게 은빛으로 물든 긴 머리칼, 검은 테 안경을 쓴 게스트 A는 차만 30년 넘게 연구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차 전문가라고 했다. 서울에선 주로 외국인 대상으로 차 관련 클래스를 종종 진행하며, 필리핀 보홀섬엔 커피 농장을 가지고 있는 농장주이기도 했다.


60대 남짓으로 보이는 그녀는 꽤 힙한 모자에 캐주얼하게 입은 옷, 연극톤의 발성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가 소위 생각하는 차 전문가의 정적인 우아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데, 직업인으로 그녀가 손님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일종의 차 의식에 포함되는 연기(acting)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차 클래스 진행을 참 잘할 거 같았다.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오래전부터 눈여겨봤던 이 숙소에 꼭 와봐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거기서 이곳 하동까지 무려 택시를 탔다고 한다. 그녀가 순천에서 사 왔다는 칠게빵을 1개 집어 먹으며 "순천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라고 되물었다.


언젠가 "하동에 어떻게 가지?"라는 질문에 남편이 "순천이 가까우니까 순천까지 기차 타고 간 후에 하동 가면 되는 거 아냐?"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알아볼 생각 없이, 서울역으로 가서 순천 가는 기차를 타고 내려서 칠게빵을 사면서 하동 어떻게 가냐고 물어봤다고. 그러다가 버스 시간이 너무 늦으면 차밭을 못 볼 거 같아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쌍계사 길 예쁜데 거기 거쳐서 갈까요?"라는 택시 기사의 은밀한 꼬드김에 넘어가, 쌍계사 십리길 드라이브까지 알차게 즐기고 왔다고.


그녀는 모놀로그를 했다. 공용 공간에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폼이 심상치 않다. 혹시 연극했냐고 물으니, 한 때 작은 무대에 종종 올라가 어린 왕자 주정뱅이 모놀로그 등을 재미 삼아했었다고. (실제로 그녀가 어린 왕자 속 주정뱅이 모놀로그를 살짝 보여줬는데, 이것 때문에 난 숙소에 머무르면서 어린 왕자를 다시 한번 정독했다)


어렸을 적부터 모험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했던 그녀가 푸는 인생썰엔 "보홀 커피농장 시작한 썰"부터 "살면서 100가지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는 썰" 등을 비롯해 차 관련된 한국인들의 잘못된 상식, 보성과 하동의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무려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거의 독백에 가까울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내 나이 또래에선 좀처럼 듣기 힘든 경험들이 많아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이야기와 더불어, 다락방같이 편안하게 조성된 이 게스트하우스 공용 공간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나무 소재로 만들어진 가구와 각종 소품과 다기, 책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A가 나와 또 다른 게스트 C를 청중 삼아 펼치는 스토리텔링 쇼. 이 순간도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찌 됐건 그녀의 모놀로그로 인해 "이 숙소에서 2주 살이를 선택하길 잘했어. 흥미로운 게스트가 많을 거 같아"란 기대감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차 만드는 방법


녹차는 찻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크게 우전과 세작으로 나눌 수 있다. 우전은 24 절기 중 '곡우穀雨' 5일 전, 이른 봄에 딴 찻잎을 덖어서 만든 차인데 여린 차순으로 만들어서 은은하고 순한 맛이 특징인데 만드는 과정에 손이 많이 가고,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다. 세작은 곡우 직후에 채엽한 차로 작설차라고도 불리는데, 우전보다는 조금 더 보편적인 녹차라고 보면 된다.


4월은 하동 녹차 다원들이 가장 바쁜 시기이다. 우전차를 만들 찻잎 따는 시기인데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 찻잎 딴 이후엔 이를 살짝 시들렸다가, 커다란 솥에 손으로 덖는다 (기름 없이 뜨거운 솥에 찻잎을 볶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잘 덖은 찻잎을 뭉쳐서 마치 떡 반죽을 굴리는 양, 손에 힘을 주고 찻잎을 굴렸다가 풀어주고, 또다시 굴렸다가 풀어주는 유념 작업을 한다. 이후 다시 솥에 덖고 유념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작업을 많이 반복할수록 차는 구수한 맛이 강해진다. 만약 연하고 풋내 나는 차를 좋아한다면 유념과 덖음 작업 과정을 줄여서 하면 된다.


보통 4월 중순부터 시작해 4월 말 정도면 다원들이 각자 만든 우전 햇차를 맛볼 수 있는데 올해는 기후 이상으로 인해 찻잎이 늦게 돋아나 일정이 다소 늦어졌다. 나 같은 경우에도 4월 15일 전후 예정이었는데 아직 찻잎이 많이 자라지 않아, 약 4~5일 후에서야 차 만들기 체험을 시작했다.




찻잎 따기 중독

차 만들기 체험을 진행해 주시는 D는 숙소 사장님의 누나였다. 멋지게 기른 은발을 양갈래로 묶고 밀짚모자를 쓰면서 항상 정원을 가꾸곤 하는데, 동생이 차밭을 가진 숙소를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차 공부를 하게 됐다고 한다. 차를 전문적으로 공부했다기 보단, 본인도 항상 배우는 자세로 강의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익혀왔다고.


"내일 아침부터 찻잎 따면 좋을 거 같아요"

나 말고도 차 만들기 체험을 하러 오는 게스트 E가 한 분 더 있다고 했다. 그분은 4년 전 처음, 이곳에서 차 만들기 체험을 하고 매년 이맘때쯤 방문한다고. 그래서 전날, 차밭을 내려다보는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차 이론 공부를 하고, 내일 아침 원하는 시간에 먼저 찻잎 따기를 시작하라며, 찻잎을 어떻게 따는지 시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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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똑같은 나뭇잎처럼 보이지만, 차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뾰족한 '침'같은 게 있고 이를 잎 2~3개가 감싸고 있는 형태이다. 이 침과 함께 잎 2개 (1심 2 엽)을 함께 따면 된다. 차 중에는 이 '침'만 따서 말려 만드는 차도 있다고 한다.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평소엔 아침 8시가 돼서야 겨우 일어났는데, 이날은 아침 일찍 찻잎 딴다는 설렘 때문인 건지, 눈이 빨리 떠졌다. 바스락 거리는 침구를 몸에 감고 살짝 뒹굴거리다가 다락방 계단을 내려갔다.


이른 아침, 맞은편 백운산자락을 옅게 펴진 구름이 휘감고 있다. 물을 끓여 D가 만들어놓은 연잎을 머그컵에 몇 개 띄우고 우려냈다. 촉촉한 공기를 맞으며 살짝 차밭 멍을 했다. 차 만들기 체험을 나와 함께 한다는 게스트 E는 이미 찻잎을 따고 있었다. 그 움직임을 잠시 관찰하다가, 어제 준비해 둔 "차 따기를 위한 앞 주머니가 커다랗게 달린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엉덩이에 고정시켜 어디에서도 편히 앉을 수 있는 농부 의자를 어정쩡하게 맸다. 여기에 목덜미까지 천이 내려와 자외선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할 수 있는 모자까지 쓰니 영락없는 농부였다.


그늘가에 위치한 차나무들 찻잎이 빨리 올라왔다는 D의 조언을 떠올리며 찻잎을 따기 시작했다. 어제 가르쳐준 모양대로 찻잎을 따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모르고 봤을 땐 그저 다 똑같은 잎으로 보였던 차나무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는데 여기저기 딸 것들 투성이라 신나는 마음으로 찻잎을 딴다. 힘이 들기보단, 오히려 찻잎을 딴다는 이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명상에 가까웠다.

IMG_3196.JPG 찻잎 따는 모습

물론, 이 일을 매일 직업처럼 하는 분들에겐 노동이겠지만, 어쩌다가 한 번 찻잎 따기는 확실히 힐링되는 체험인 것은 분명하다. 몇 시간을 넘게 앉았다가 일어서길 반복하며 찻잎을 주머니에 담는 걸 반복했는데 체력 소모는 거의 없다. 물론, 해가 중천에 뜨면 그 열기 때문에 찻잎 따는 것을 멈추게 된다. 농촌 사람들의 일과는 왜 새벽에 시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도시 사람으로서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랄까.


이 날 찻잎을 딴 이후, 하동 어느 다원이나 차밭을 가면 찻잎을 따고 싶은 충동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정말 예쁘게 자라 지금 따면 완벽할 거 같은 찻잎들을 보면 "아 이거 따주고 싶다"라고 생각이 들 정도랄까? 실제로 하동에선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찻잎 따기 체험'을 돈 받고 진행한다고 한다.

IMG_1432.HEIC 아침동안 딴 찻잎 말리기

"제가 돈 주고 노동을 한다고요? 근데 그 찻잎은 제가 가지는 게 아니고?" 찻잎을 따보니, 왜 돈을 주면서까지 찻잎 따게 해달라는 지 알겠다. 그야말로 찻잎을 따는 무아지경에 빠져들면, 이만한 생산적인(?) 명상이 없다. 나같이 한번 찻잎 따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의 욕구(?)를 해소하면서 다원에선 노동력을 해결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숙소에 머무르면서 자원봉사 개념으로 다원 찻잎 따기 하러 오신 분들을 여럿 만났는데 대부분 차를 전문적으로 알진 못하지만, 차 따기 체험을 한번 하고 난 이후, 이를 못 잊어서 매년 찾아온다고. 이날 이후, 나는 황차와 홍차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핑계로, 하동 2주 살이를 하면서 심심할 때 숙소 앞 차밭에서 찻잎을 땄다.

아무래도, 매년 4월 이맘때쯤, "하동에 찻잎 따러 가야겠다"란 새로운 연간 이벤트가 생긴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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