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멕시코 시골 마을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까사스에서 만난 사람들 01

by 노마


해발 2,200m.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2,744m)보다 살짝 못 미치는 높이다. 숫자로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그곳에 발을 디디면 공기가 다르다는 걸 금세 알게 된다.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까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는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작은 도시로, 과테말라 국경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위키피디아에선 1년 내내 온난하고 서늘한 기후을 자랑한다고 적혀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침과 저녁에는 두툼한 경량 패딩을 입고, 오후에는 반팔 티셔츠로도 충분한, 그런 애매하고도 완벽한 날씨다.

IMG_2024.JPG

이 곳은 멕시코의 뜨거운 열기에 지친 배낭여행객들이 과테말라로 넘어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는 휴게소 같은 곳이다. 알록달록한 직물로 짠 전통복장을 입은 원주민들의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는 곳인데다, 저렴한 물가, 치안도 꽤 좋은 편이다. 한화 3천원이면, 테라스에 앉아 싸구려 레드와인에 간단한 핑거푸드를 즐길 수 있는 바들이 즐비하다. 잠시 열기를 식힌다고 머무르게 된 외국인들이 시원한 날씨, 상대적으로 높은 삶의 질이라는 달콤함에 빠져 “하루만 더”라고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수개월간 눌러앉게 되는 블랙홀 같은 곳이기도 하다.

IMG_1490.JPG

내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에는 매일 아침 달걀 요리와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일본인 H가 있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매일 아침 게스트들에게 조식을 제공해주는 대신,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을 얻어 장기 숙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서 처음에는 그도 그런 경우려니 생각했다. 조식업무가 끝나면, H는 자신의 기타를 들고 공용 공간 소파에 앉아 뚱땅거렸다. 입고 있는 옷과 소지품들은 모두 해졌지만, 기타 만큼은 정성스럽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IMG_2786.JPG 일본인H가 매일 아침 만들어주었던 아침 식사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곳에 머물렀냐는 질문에 그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냥 으레 하는 표현이 아니었다. 정말로, 진짜로 기억을 못하는 듯 했다. 일본도 한국처럼 관광비자로 6개월 정도 머물 수 있을 테니, 아무리 길어도 그 정도겠거니 생각했다. 아니면, 매번 비자런을 하며 수년을 지내는 걸까? 과테말라와 국경이 가까워서 장기 체류자들은 때가 되면 과테말라를 당일치기로 다녀와 체류기간을 연장하곤 한다. 그런데 H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여권이 없어요.” 그는 여행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을 담담하게 말했다. 강도를 만났냐, 잃어버렸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며 아침을 해주거나 벽화를 그려주는 등 잡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여권을 일부러 버렸다고 했다. 예전 인도에서 여권을 버리고 요가 수련을 하며 살아가는 히피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가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웠다. 안정을 추구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사는 진짜 히피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요즘 자칭 히피들도 대부분은 “여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니까.


물론 요즘엔 자유와 평화, 반물질주의를 숭배하는 히피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네오 히피들이 서구를 중심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네오 히피’라는 단어를 직접 쓰진 않지만, 환경을 해치지 않고,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한다던지,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마음에 집중하는 마인드풀 명상, 사회의 보편적 기준이 만들어놓은 잣대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두 크게 보면 네오 히피라고 볼 수 있다.

IMG_3071.JPG

여행하면서 종종 만나는 디지털 노마드들도 대개 그런 부류였다. 하지만, H는 1960년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클래식 히피였다. 태어난 환경과 전혀 다른 국가의 한 산간마을이 마음에 들어, 평생 살 생각으로 여권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지만, 거리에서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를 감히 누가 신고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의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시 느려진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목줄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인 삶의 무게를 모두 내려놓은 채, 지금 이 순간에만 온전히 존재하는 것 말이다.



예약한 버스표를 버리고 체류하게 된 사연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노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디지털 노마드로서 일을 하며 세계여행을 합니다. 한국 환승하면서 암 3기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 후 다시 배낭을 메기 시작했습니다. 뻔하지 않은 여행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1,35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3화악명높은 도시의 이방인에 대한 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