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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기간이 있는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

산 크리스토발 레스 까사스에서 만난 사람 03

by 노마

가벼운 관계는 시작을 하지 않는 나를 사람들은 답답해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온 세르히오(Serigo)는 처음 마주친 것은 오븐 앞에서였다. 내가 주최한 첫 대규모 바베큐 파티 당일 체크인한 그는, 오븐에서 버팔로 윙을 꺼내고 있는 내게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도울 게 없냐고 물었다. 오늘 막 도착한 사람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다며 그를 주방에서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 “밖에 불 지피는 다른 게스트들이랑 어울리는 게 어때? 모두 쿨한 사람들이야”

IMG_4715.JPG 세르히오와 처음 만난 바베큐 나잇

그는 내가 보내는 모든 메시지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매주 이벤트를 기획하고 단체 채팅창에 공유할 때 혹시나 사람들의 반응이 없으면 어쩌지하면서 긴장을 하게 되는데, 그는 항상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을 명단에 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내 동선에 자주 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훗날 그가 말하기를 자신의 방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발걸음 소리 중 헐렁한 슬리퍼를 질질 끄는 듯한 내 발걸음 소리를 정확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세르히오는 일본어를 조금 배웠을 정도로,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 내년쯤에는 일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시차가 다른 국가에는 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일본은 멕시코와 시간이 정반대라 디지털 노마드로서는 무리고, 긴 휴가를 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고. 그는 미국인들로 가득한 이 곳에서 일본과 비슷한 문화권의 한국 여자가 스태프로 일을 하는 것이 신기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갔다고 고백했다. 멕시코인치곤 다소 내성적인 편인 그의 눈에는 조용할 거 같은 아시아 여성이 목소리 높여 숙소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더욱 진귀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세르히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눈치가 챈 사실이었다. 종종, 그와 저녁 타코를 먹고, 금요일 모임에 뒤늦게 나타나면, 사람들은 장난스럽게 “데이트 잘 즐기다 왔냐”고 물었다. 나는 괜히 모른 척하며 “진짜 이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타코를 먹고 왔다”며 괜히 화제를 돌렸다. 만에 하나, 그가 나에게 고백하면 어쩌지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에게 전혀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을 뿐 더러, 여행을 하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같은 여행자를 만나는 게 아닌 이상, 결국 떠나기로 예정이 되었던 사람이 매몰찬 사람이 되어버린다. 예정된 이별을 감수하고, 감정적인 소모를 하고 싶진 않았다.


알리제는 관계에 대해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캐주얼한 관계(Causal relationship)”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깊은 정서적 헌신이나 독점 없이 가볍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연애 관계를 뜻한다. 소위 말하는 원나잇 스탠드나 사귀지는 않는데 연인처럼 구는 시추에이션십(Situationship), 성관계는 하지만 연인은 아닌 사이(FWB: Friends with benefits)가 이에 해당한다. 진지한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캐주얼한 관계에서 충분히 시작해볼 수 있지 않냐며, 데이팅앱 사용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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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노마드로서 일을 하며 세계여행을 합니다. 한국 환승하면서 암 3기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 후 다시 배낭을 메기 시작했습니다. 뻔하지 않은 여행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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