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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호 Apr 22. 2020

공과 사는 쫌

 "사적인 영역만큼은 내가 알아서."

 ('사적이다'는 지극히 개인에 관계된 것)


 멘탈 . 입사 후 몇 년 되지 않아 들었던 별명이었다. 팀장의 무차별적 공격에도 잘 버티는 게 신기했는지 후배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렇다고 후배에게 모범이 되거나 그들의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불의를 보고도 참기만 해서는 결코 후배를 지킬 수 없었다.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을 되짚는 이유는 어느덧 십 년이 지나 막상 그 팀장 직급이 되어 보니 악습을 더 이상 방관하고 싶지 않았. 그때의 괴롭힘과 갑질을 향해 당당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이제라도 세상을 바로 보고 싶다.


 "누가 팀장에게 팀원의 인생을 관리하라고 했는가." 


 회사비즈니스적 관계를 맺는 무대와 다. 그러나 몇몇은 공적인 비즈니스를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 해석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팀장이 팀원한테 빨리 결혼해서 정착하라고 하는 , 그게 사람 관리야."

 기가 막혀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결혼은 해야만 한다. 할 거면 빨리 하는 게 낫다.'라는 답을 정해 놓고 남의 인생을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네가 경험을 안 해서 몰라. 다음 달까지 회사 근처로 이사 와. 못 와? 그럼 언제 올 건데?"

 마치 업무 지시처럼 들렸다. 연애, 결혼, 이사, 부부 관계, 육아, 여행 심지어 여가 생활까지 상급자의 조언이 도를 지나칠 때가 있었다. 쉽게 던진 말 한마디가 강요와 폭언이 될 수 있는데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는 몰라서 그럴까. 알면서 그런 걸까. 사람마다 가치관과 사는 사정이 다르고 시대도 변했다. 내가 아는 그 답이 언제까지나 정답이 될 순 없다.


 "라떼 이즈 홀스"

 (꼰대가 자주 쓰는 '나 때는 말이야.'를 비꼰 말)


 과거에 통했던 방식이 지금도 통할 거라는 가정은 착각일 수 있다. 우체부의 편지를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었던 시대가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영화 '클래식'은 제목처럼 그 시절 러브 스타일을 잘 표현했다. 영화 속 조승우는 친구 이기우를 대신해서 연애편지를 써 준다. 손예진이 편지를 쓴 게 조승우라는 것을 알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손편지는 그 시대에 누릴 수 있는 낭만이었고 아름다운 추억이자 흔한 사랑법이었다. 반면, 같은 영화 속 현재를 사는 조인성은 편지 대신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 또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고 역시나 통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해 손편지를 쓰거나 그녀의 집 앞에서 기약 없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그때는 그 때라서 더 아름답다.


  "왜 그만 하라고 못할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팀장들이 있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그랬다. 상사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으면 그것을 아래로 내리곤 했다. 위와 맞서는 것을 보기도 힘들었지만 맞서려는 사람은 하나 둘 경쟁에서 밀려 결국에는 조직을 떠났다. 그러면 남은 팀장들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해도 안 돼. 너만 손해 봐. 너만 힘들게 돼.'

 마치 사이비를 부정하다가 결국 빠지게 되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저항을 포기하는 순간 더 큰 횡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겪었던 한 팀장은 마초 같은 타입이었다. 그는 상사에 대한 눈치는 빨랐지만 팀원의 감정에 대한 공감대는 매우 낮았다. 팀원을 로봇이나 노예처럼 부리기를 좋아했다.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크게 실수하고 잘못한 것처럼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치고 화를 냈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고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단체 채팅방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지시를 거역하는 시늉만 해도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한 사이비 교주가 신도들의 노동과 돈을 착취하기 위해 쓰는 수법과 흡사했다. 그렇게 팀원은 비정상인으로 세뇌당했다. 남은 자존심까지 포기하게끔 만들었다. 나아가 사생활까지 컨트롤하려고 했다. 팀원들과 난 마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소름 돋는 것은 나 또한 그를 닮을 뻔했다는 것이다. 한 번 그랬다. 나도 모르게 아끼는 후배에게 정색을 했다. 그 순간 황당한 후배의 눈동자에서 다시 나를 보았다. '그래, 처음에는 나도 황당해했었지..' 그 순간 깨달았다.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팀장에게 배운 게 많았다. 절대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가 수 십 가지 모이니까 그 반대로만 해도 좋은 리더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팀장, 너도 회사원이야. 팀원이나 팀장이나 회사와 고용 계약 관계잖아."


 팀원들은 회사와 계약을 했고 팀장 또한 회사와 근로 계약서에 서명한 회사원이다. 그래서 난 상사라는 표현보다 선배라는 말이 좋다. 상사(上司)의 반의어는 부하(部下)다. 각각 위 상(上)과 아래 하(下) 자가 쓰였다. '내가 위에 있고 너는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말이다. 군대에서는 상사가 지시하면 부하는 따라야만 한다. 목숨이 걸려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필요한 소통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회사에서도 그래야만 할까? 회사와 계약을 할 때 모든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조항은 없을뿐더러 생사가 걸려있는 상황도 없는 게 당연하다. 대부분은 그런 척을 할 뿐이다.

 이와 다르게 선배와 후배는 앞 선(先)과 뒤 후(後)를 쓴다. 학교나 회사 생활을 먼저 시작한 사람들에게 선배라는 호칭을 붙인다. 앞에서 리드하는 게 선배, 뒤에서 따라가는 게 후배인 것이다. 위아래가 아니라 앞뒤에서 대화가 가능한 관계이다. 그러나 회사에 선배보다는 상사가 더 많았다. 입사가 빠르면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1년, 1개월은 긴 시간일 수 있지만 10년 이상 경력자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다. 근속보다는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 경험 차이가 훨씬 크다. 마치 아이에게 한 학년이 큰 차이 일지라도 성인한테 1년은 눈 감았다 뜨면 캐롤이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100년을 살았다는 삶의 기간보다 30년 동안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짬이 더 찼으니까.' 이 말은 너무나 쉽게 사람들의 순위를 매기곤 했다. 그 짬을 근거로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 이거야 말로 정말 NO 답이다. 스포츠로 비유하면 오래 그 종목을 했다고 매번 금메달을 목에 걸 순 없다. 인생의 굴곡선은 사람마다 다르고 어느 경험과 지식은 후배가 선배보다 나을 수 있다. 쿨하게 인정하자 좀. 자꾸 아닌 척하다 보니 선배는 쪽 팔리고 후배는 뻘쭘하게 된다. 

 

 "나의 삶을 보듬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애 첫 투표를 앞둔 열여덟 살 학생이 꿈꾸는 세상이다. '내'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식당에서 밥을 혼자 먹어도 집에서 혼자 놀아도 충분히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꺼리가 많아졌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 어떨까.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고 나와 같지 않은 것도 인정해 주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다. 최소한 공과 사는 쫌! 터치하지 말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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