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며니 Jan 26. 2019

내 코에 화이트헤드

마이크로 뷰티와 그루밍

유튜브 없이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던 동기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 중이었다. 외모에 관심이 매우 많거나 뷰티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던 단어들을 그의 목소리가 발음하니 새삼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대학생 때 스킨과 로션 등 기초 화장품도 바르기 귀찮아했었다. 오후 수업시간에도 얼굴에 배게 자국을 문신처럼 선명히 새기고 다녔던 사람 말이다. 동기는 먹방, 게임, 자동차, 여행, 놀이 콘텐츠를 섭렵하고 볼 게 없어져서 뷰티까지 스트리밍 되는 족족 보고 있다고 했다. 각종 뷰티 영상에서 몰랐던 단어들을 익히고 말하며 그의 세계를 넓히는 중이었다. 미용 단어들을 자동으로 암기한 후부터 본인의 얼굴을 시작으로 타인의 눈코입 주변 미세한 피부를 돋보기로 보듯 구체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뷰티 유튜버들의 콘텐츠를 매시간 섭취하면서부터 이전에는 시선이 가지 않았던 영역으로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코에 화이트헤드(코의 피지가 하얀색이면 화이트헤드, 까만색이면 블랙헤드)가 많아서 피지 관리와 각질 제거를 열심히 하고 있어."
"피부결에 실핏줄이 비치네? 너도 나처럼 피부가 얇은가 보다."
"화이트 토닝(피부과 레이저 시술 중 하나) 할인해서 10회에 180만 원인데 하면 좋을까?"
왼쪽은 블랙헤드와 화이트헤드가 있는 코, 오른쪽은 제거한 코다. 뷰티 콘텐츠들을 보며 미세한 자기 관리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디스패치 스마트인컴


그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습관적으로 유튜브 앱을 켠다고 했다. 청소는 로봇청소기에게 맡기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로 대부분의 업무와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요즘 보통의 사람들도 자투리 시간은 늘 모바일 콘텐츠를 소비하며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추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 옆의 미세한 주름, 입술의 잔주름에도 필러와 보톡스를 넣으며 피부과에서 작은 모공들을 메꾸고, 서로의 시술을 공유하는 건 상대적으로 비는 시간이 많은 중년의 일상이었다. 넘치는 시간들 앞에서 시선은 자연히 스스로의 몸으로 향한다. 상의, 하의, 속옷, 머리 매무새 등 전체적인 모습에 신경을 쓰기에도 시간과 자원이 부족했던 우리가 나와 서로의 얼굴에 돋보기를 들이대게 된 것이다.


시간은 넘치고 현미경을 들이댄 듯 얼굴의 곳곳을 가꾸는 영상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진다. 중독된 듯 영상을 보기 시작하며 외모에 민감하지 않은 이들도 눈썹과 눈두덩이 사이에 난 잔털이 보이기 시작한다. 족집게를 들고 온 몸의 털을 뽑는 것을 시작으로 콧잔등의 모래알보다 작은 블랙헤드를 정성스레 문질러 관리하는 일에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한다. 내 얼굴을 볼 때 생긴 현미경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사용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모공을 보며 '스스로에게 시간 투자를 잘하지 않는군.'이라고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뷰티와 그루밍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됐다. TV 화질이 좋아질수록 화장시간이 길어지고 피부 관리하기 힘들다고 푸념하던 연예인의 심정을 내가 느끼게 될 줄이야.

 

조개를 족집개 삼아 온 몸의 털을 뽑고 가발을 썼던 이집트 여인들. 모나리자가 살던 시대도 넓은 이마가 아름다움의 기준이라 얼굴의 털을 뽑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우리가 현미경을 대듯 타인의 털과 피지까지 보게 된 것은 남는 시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거 산업사회가 되기 전 사람들 역시 남는 게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난 곳에서 자라고 묻혔다. 전기, 인터넷, TV 등이 없어서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았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귀족들은 모든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해줘서 더 지독하게 무료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왕족들은 몸에 털이 한 톨도 없었다. 머리카락은 물론 눈썹, 팔과 얼굴의 솜털까지 깨끗하게 없애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족집게와 청동 면도날을 관속에도 가져간 클레오파트라를 보면 죽어서도 털 관리는 소중했나 보다. 그들이 거느린 수십 명의 시종은 늘 족집게를 들고 귀족들의 잔털을 한올씩 뽑았고, 여왕들은 현대처럼 뜨거운 촛농으로 제모(왁싱)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체모가 없이 매끈하게 반짝이는 정수리와 신체가 재력으로부터 나오는 그들의 여유로움을 증명했다. TV도 이동수단도 발달하지 않았던 이집트 파라오의 시대를 시작으로 얼굴과 이마의 털을 다 없앤 빅토리아 여왕 등 제자리에 갇혀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냈던 이들은 신체를 가꿀 때 보이지않는 미세한 솜털까지 관리하며 자기 만족도를 높였다.


솜털 한 올도 용납하지 않은 파라오의 반짝이는 두피와 얼굴 그리고 신체. 우리의 얼굴도 모공과 작은 피지도 없이 매끈해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산업사회를 살던 사람들은 제대로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했다. 시간이 곧 금이었던 시절에는 내 털도 남의 털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코의 작은 피지 덩어리를 뽑고 녹이는 시간에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 인맥을 만들어야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러다 다시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이 할 일이 점점 없어진 지금을 맞았다. 방구석에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화상으로 대화를 할 수 있어 물리적인 시간이 남고, 우리의 일을 대신해주는 각종 기계와 AI들이 생각할 시간도 벌어줬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우리의 시선은 다시 가장 미세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이렇게나 많아도 일상에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거울에 코를 붙이고 앉아 족집게로 구석구석 관리를 한다. 그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냥 내 얼굴에 자연스레 생겨 잘 보이지도 않던 미세한 기름 뭉치였는데. '화이트 헤드를 제거해야겟다'라는 말을 수염도 잘 안 깎던 동기에게 듣다니. 참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코피지 없애는 법>을 검색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