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함께 스터디를 하던 후배가 오다 샀다며 나에게 로드샵 화장품 가게의 쇼핑백을 내밀었다. 네이처 리퍼블릭? 나 오늘 생일도 아닌데 웬 화장품 선물이냐고 물었다. 세 살 터울 남동생은 당황한 듯 1+1이라 내가 생각나서 샀다고 했다. 그는 스터디 룸을 나서며 종이 쇼핑백을 내밀고 도망치듯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여자 친구도 있는 애가 갑자기 날 챙기는 이유가 뭘까. '1년 넘게 안 하던 짓을 하네. 뭐 부탁하려고 그러나.' 아무튼 예상치 못한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다. 씩- 웃으며 봉지 안에 들어있는 화장품을 꺼냈다. 귀여운 펭귄 모양의 신기하게 생긴 게 들어있었다.
날개에 발까지 달렸어! 엄청 귀엽게 생겼네. 신제품인가? 요즘 화장품은 패키지가 특이하고 귀엽게 나오는구나.
근데 이게 어디에 쓰는 거지? 스프레이 제품이고... 얼굴에 뿌리는 미스트인가? 알루미늄 캔에 쓰인 작은 글씨를 읽는데. 그것은 발 냄새 스프레이였다! 신발냄새 스프레이. 그때부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아이는 분명 1+1이라서 샀다고 했다. 그러니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다. 근데 화장품이 뜻밖에 한 개가 더 생겼으면 여자 친구를 주지 왜 굳이 나에게 준 거지? 차라리 스터디원들이 다 있을 때 하나 남으니 가지라고 줬으면 나에게 발 냄새가 난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 종이봉투에 담아 나에게 주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황급히 고개를 떨궈 내 발을 바라봤다. 그 날은 발목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발 냄새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전과자가 된 기분으로 내가 밀폐된 스터디룸에서 냄새를 풍겼을 날이 언제였을까 고민했다. 우리가 스터디한 1년을 되돌아봤다. 여름이면 난 비가 오는 날도 발을 고정하는 두 줄 외에 발가락과 발등이 훤히 드러난 샌들을 신었다. 겨울엔 수족냉증 탓에 수면양말을 신고 어그 부츠를 신었다. 대체 얼마나 심했길래 스프레이까지 사서 쥐어줬을까. 집으로 가서 맡길 수 있는 신발들은 운동화 빨래방에 다 가져갔다. 운동화 빨래방에 맡길 때 '발 냄새 케어'에 체크해 신발 한 쌍에 1,000원 정도를 더 줬다. 아저씨는 사람 좋게 "발 냄새 별로 안 나는데?"라고 해주셨으나 못 들은 체하고 멋쩍게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나도, 스프레이를 선물한 동생도 그 후에 펭귄 스프레이에 대해 말을 나누진 않았다. 하지만 대체 나의 발 냄새의 원인이 어딘지 찾지 못해서 열심히 모든 신발 속에 슈즈 스프레이를 뿌렸다. 그리고 킁킁. 신발 속에 코를 대봤다. 예전부터 냄새를 관리하던 아빠 구두와 함께 베이킹 소다도 뿌려두고, 신문지를 넣어 신발장이 아닌 바깥에 신발을 두는 등 냄새 예방에 총력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 신발 속을 킁킁거려도 눈살을 찌푸릴만한 향은 나지 않았다. 유난을 떠는 나에게 엄마도 나와 내 신발에서 특이한 냄새는 못 맡았다고 하셨다. 나는 신발들을 관리하면서도 엄마와 함께 '스터디원 남동생 후각이 조금 예민했나 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펭귄 스프레이가 뒤통수를 후려치던 날의 얼얼함이 잊혀질때 쯤. 아빠가 운전하고 엄마가 조수석에 타고 계시던 날의 일이었다. 친척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 나는 원피스에 예쁜 분홍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다. 한참 차를 타고 가다 자리가 불편해서 뒷좌석에 앉아 신발을 벗고 앞좌석 쪽 팔걸이에 두 발을 올렸다. 매우 편안하게 다리를 쭉 뻗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나에게 아빠가 신경질적으로 창문 여는 버튼을 누르며 짜증을 냈다.
너는 여자애가 무슨 발 냄새가 이렇게 나냐!
충격이었다. 발에 땀이 많은 데다 무좀도 있어 발 냄새가 심하다는 가족의 질타를 받는 아빠였는데. 그 날 아빠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엄마는 냄새가 안 난다고 하지 않고 아빠의 말투를 지적하셨다. 나도 너무 민망해 아빠에게 왜 짜증이냐고 되레 신경질을 냈다. 그 날은 나일론 스타킹을 신고 한참을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며 친척들을 도와주느라 신발 안이 촉촉한 느낌은 받았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 있게 뻗은 발을 접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제야 내 코에도 닿는 뜨끈하고 구릿한 식초의 향취.
아빠의 화끈한 직언으로 나에게도 발 냄새가 나는 날, 그것도 좀 심하게 나는 날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화학 섬유 재질의 스타킹을 신고 딱 맞는 구두를 하루 종일 신고 있으면 냄새가 나는 거였다! 나는 매일 발 냄새가 나는 건 아니지만 특정한 조건이 갖춰졌을 땐 누구보다 강력한 악취 대장이 됐다. 센스 있는 스터디원의 소리 없는 지적을 받고 1년 넘게 지난 후에야 냄새 성립 조건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면접이 있는 날이면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스터디룸에 들어가 밀폐된 방 안에서 피곤한 발을 구두에서 빼 한 시간 넘게 구두 위에 얹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후각 테러를 가했던 시간들 속 희생자들께 사과의 말을 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뒤로는 구두를 신을 땐 신발냄새 스프레이와 발용 데오드란트를 꼼꼼하게 뿌렸다. 과거와는 다르게 요즘에는 올리브영 등의 드러그 스토어에 발 건강과 신발냄새를 잡는 굉장히 다양한 제품들이 나오고 있어 다행이다. (이유는 몰라도 독일산 스프레이 제품 성능이 가장 뛰어났다!) 이후 해외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여성들이 구두에 칙칙 스프레이를 뿌리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는 아무리 발이 아파도 구두에서 발을 빼지 않았다. 갇힌 신발 속에서 고통받는 발이 주인도 모르게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는 동료들에게 센스 있게 사실을 전달하는 법은 요즘도 잘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