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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히 Oct 04. 2023

4-1. 내 남자친구의 '진짜' 우울증

 우울증은 '여기가 바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머지않아 그게 바닥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한다. 2021년 3월은 바로 그런 달이었다. 우울증이 지나가길 바라며 보냈던 2년 간의 대학원 휴학을 끝내고 상봉이는 복학을 했다. 그런데 일주일도 채 다니지 못하고 다시 드러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주말이 가고 월요일이 돼도 일어나지 못했다. 상봉이가 다니고 있던 대학원은 휴학 기간이 최대 2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자퇴서를 냈다. 곧바로 정신병동에 입원할 방법을 찾았다. 입학이 쉽지 않았던 대학원을 포기하면서까지 정신병동에 입원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죽고 싶은 마음을 넘어 죽을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했기 때문이라고 상봉이는 말했다. 다행히 평소 다니던 정신병원에서 상봉이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대학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할 방법을 알아봐 주셨다.  “꼭 다 나아서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상봉이는 떠났다.       

   

 늘 둘이 있던 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방안을 둘러봤던 그날의 느낌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곳에서 상봉이는 죽음을 생각했구나. 눈이 닿는 곳곳에 내가 모르는 죽음이 산재해 있었다는 사실이 아찔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상봉이가 수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는 것이 속상했는데 오늘은 오늘이 그 어제와 같지 않다는 사실에 슬펐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 보낸 게임 의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고, 24시간 돌아가던 게임기는 영원히 켜질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상봉이가 오래 전 덮어두었던 책들은 이대로 수북한 먼지에 묻혀 수명을 끝낼 것 같았다. 상봉이를 둘러쌌던 주변의 공기는 그대로 가라앉고 있었고, 상봉이의 시간은 이대로 멈춰 다시는 흘러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어느 산책길에 상봉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라는 말에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가 담겨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을 인정하는 일은, 상봉이에게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었고 나에게는 그런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과정이었다. 흔하디흔한 그 말이 우리는 참 어려웠다.

 은연중에 남자친구의 우울증을 피해 다녔던 날들이 떠올랐다. 저절로 증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던 시간, 사람들의 안부 인사에 단순히 심한 공황장애일 뿐이라고 얼버무렸던 말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우울증이라며 합리화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슬럼프, 공황장애, 불안장애, 대인기피증... 의사가 일찍이 진단 내려준 '우울증'이라는 병명에 남자친구도 나도 덕지덕지 다른 이름들을 붙이며 2-3년을 도망쳤다. 그 사이 우울증은 더욱 몸집을 불리고 불려 다른 이름들로는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제야 나는 벌거벗고 서 있는 남자친구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의사는 남자친구에게 ‘중증 우울 장애’라는 진단을 내려줬고,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내 남자친구는 우울증 환자라고 말한다.     

 어쩌면 상대를 거짓 없이 받아들일 줄 아는 일보다 그저 사랑하기만 하는 일이 훨씬 단순하고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사랑한다는 믿음 뒤로 몸을 숨긴 다른 마음들이 있었다. 그의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기대 나의 안녕을 바랐던 마음, 자식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 되는 부모의 마음처럼 상봉이를 바라보았던 마음들이 쭈뼛쭈뼛 서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고 있었다. 내 남자친구는 우울증에 걸릴 만한 사람이 아닌데 그럼에도 우울증에 걸렸다고. 그런데 실은 나도 몰래 생각하곤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렇게 긴 시간 우울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실은 마음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다른 우울증 환자는 밖에도 잘만 나가고 친구들도 잘 만나고 직장 생활도 무리 없이 하던데, 라는 생각. 우울증이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으면서도 실은 나조차도 우울증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 처음으로 상봉이가 초라하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 꾹꾹 울음을 참는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에게 대체 왜 이런 일이 닥친 것인지, 우울증은 운이 나빠 발생한 신경회로의 문제인지 나약함 때문인지, 대체 낫기는 하는 병인지 그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아졌다.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지금 힘든 상봉이를 꼬옥 안아줄 수 있다는 것, 상봉이가 죽지 않아서 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연인이 제일 작아 보인 그 순간 도리어 애틋하고 아련하고 소중한 기운이 나를 에워싼 채 뽈록뽈록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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