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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히 Apr 29. 2024

6-1. 이별 말고 (독립)

 두루미는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잔다. 그건 자면서도 물의 진동을 통해 들짐승이 다가오는 것을 재빠르게 감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포식자가 도사리는 야생에서 생존에 가장 유리한 감정은 불안일 것이다. 불안의 끈을 놓고 안심하는 순간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굶어죽지 않을 방법보다 어떻게 잘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 인간사에서 불안은 퇴행하기에 딱 알맞은 감정이 되어 버렸다. 사회안전망이 생겼고 기회는 다양해져서 잘못되면 어쩌지의 염려보다 일단 부딪쳐 보자! 해보자! 라는 설렘과 흥분이 더 풍요로운 하루를 이끈다.      

 나는 남들보다 진화가 한참이나 뒤쳐져서 나의 감정은 원시 시대의 생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내면에는 두루미처럼 불안의 강물이 깔려 있다. 평화로운 물결의 잔잔한 파동도, 짜릿함을 줄 너울도, 나에게는 모두 위험을 알리는 불안 신호일 뿐이다. 누군가 불러주면 꽃이 된다는 이름도 나는 꼭 재난문자 같아서 내 이름이 들리면 긴장한다. 대화의 흐름이 바뀔 때는 그 다음에 이어질 슬픈 말이 상상돼서 걱정부터 한다. 그래서 상봉이는 한참 대화 중에도 ‘이거 별 일 아닌데’라는 말로 날 안심시키곤 했다.

 언제부터 내 안에 그런 강물이 드리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나조차도 그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다섯 살 때인가 검지손가락에 큰 나무 가시가 박혔다. 나는 그게 혼날까 봐 무서워서 가시가 박힌 손가락을 숨기고 다니며 한동안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을까. 어느 날 엄마 아빠가 나의 새까매진 손가락을 발견하시고 깜짝 놀라 급히 가시를 빼고 치료를 해줬다. 내 검지손가락은 거의 썩기 직전이었다. 

 그건 한때만 머물다 간 감정은 아니었다. 유치원 운동회 때 찍은 단체 사진 속에는 혼자서만 잔뜩 어깨를 웅크린 일곱 살의 내가 서 있다. 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힘 좀 빼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아마 그때부터도 내 심장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숨죽이며 콩닥콩닥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잠들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밤을 좋아했다. 우여곡절 한 일들도 그 시간에는 잠시 유예 기간을 갖는 것 같았다.  

 불행할까 봐 불안했던 나는 꽤 오랫동안 불행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지냈다. 불행을 주시하고 있으면 그나마 거리두기를 해주는 것 같았고, 눈길을 거두는 순간 불행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불행을 최대한 멀찌감치,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조마조마하면서도 차라리 더 속 편한 일이었다. 누가 쥐어준 적도 없는 짐을 남들보다 서너 개씩 더 어깨에 이고 사는 기분이었다. 내 목은 뻐근해지고 등은 자꾸만 안으로 말렸다. 

 그런데 어느 날 만난 상봉이가 그동안 내가 이고 온 짐이 아무 쓸모도 없고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해준 것이다. 반신반의하며 짐을 내려놓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든 다시 이고 갈 심산으로 내려놓은 짐을 돌아보곤 했다. 상봉이는 짐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 데려가 줬고 그곳에서 한참을 놀다 보면 내게도 짐의 존재를 까먹는 날이 생겼다. 얼추 짐을 이고 온 시간과 짐을 내려놓은 시간이 비슷해지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대기 바빴던 심장도 정직해지는 방법을 찾아갔다.      


 중랑천을 달리면서 어미 오리 옆에서 물장구질하는 새끼 오리들을 볼 때면 상봉이 옆에 있는 나를 떠올린다. 물살을 가를 줄도 모르고 날개짓도 서툰 새끼 오리들이 텀벙텀벙 쏘다니길 좋아하고 기웃거릴 수 있는 이유는 어미가 지켜봐 줄 거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상봉이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한 파우치에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그를 태우고 선장질을 하며 씩씩하게 항해하는 내가 그려져 있다. 상봉이 옆에서 나는 꽤나 대범하고 모험적이다. 하지만 그가 함께 타고 있지 않다면 배 위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 내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 남자친구의 히키코모리 같은 우울증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내게 헤어지지 않은 이유를 가장 많이 물었다. 처음 그 질문을 듣고 내가 알아차린 것은 나는 그동안 이별을 고민한 적이 없다는 거였다. 무조건적인 사랑처럼 보여도 실은 그런 데에는 이 같은 이유도 크지 않을까. 사랑한다는 믿음을 다 벗겨 보면 그 속에는 이렇게나 꽤나 쓸 만한 알맹이가 있었던 거다. 성장의 속도가 진화의 시간을 이기지 못해서 서른세 살의 나는 여전히 걱정도 많고 염려도 많아 밤잠을 설친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는 지금까지 괜찮았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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