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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부자 Jun 03. 2024

여행에서 떠올린 일상의 다짐들

시부모님, 아이들과 함께 열흘동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조호바루, 쿠알라룸프르) 여행을 다녀왔다.


최근 2~3년 사이에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모두 돌아가시면서 남편도 나도 느낀 바가 있었다. 부모님들이 아직 건재하실 때,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부모님과 밀도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해외여행에 부모님만 모시고 가도 쉽지 않은데, 아직 어린 아이들까지 함께 가니 여러 모로 어려움이 있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현지에서 (일정이 빡빡하지 않은 조호바루에 도착하자마자) 몸살이 와서 삼일 내내 앓아 누웠고, 나는 귀국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살이 나서 지금까지 낫지 않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를 위한 여행이 전혀 아니었기에, 나는 기획자 남편의 기획을 보조하고 수행하는 제1번 일꾼으로 나의 역할을 설정했다. 그래야 욕심을 내려놓고 편한 마음으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위한 여행은 아니었어도,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순간의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고, 일상에서 한발 떨어져서 이런저런 생각과 다짐들이 떠오른 것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큰 선물이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한 책은 '도둑맞은 집중력'이었다. 비행기에서, 여행 중 틈틈이 책을 읽었고, 여행 중 소소한 생각들을 떠올리는 데 이 책이 영향을 꽤 끼친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매일 1만 5천보 가까이 걷는 힘들었던 도시 여행을 마무리하고, 조호바루에 있는 친구집으로 넘어가서 별다른 일정 없이 느긋하게 수영하고, 수영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지내던 중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내가 희망하는 일상편안하면서도 보람 있는 하루를 보내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편안하다는 것은 걱정과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 것이고,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나의 일상은 무척 편안함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뭔가가 부족했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부족한 것인지 잘 알지 못했었다.

이런 편안한 일상이 내가 딱 원하던 것 아니었나? 부족하긴 뭐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인가? 자문했는데,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조호바루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람이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오늘도 보람 있게 잘 보냈다'는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활동이 필요하다. 내게 충만한 기쁨을 주는,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고민하고 실행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밖에 여행에서 한 소소한 생각들과 작은 다짐들도 앞으로 일상을 꾸려가는 데 좋은 지침이  것 같아서 기록으로 남겨두려 한다.


5월 23일

발코니에 앉아 비 오는 수영장을 내다보며,

남편이 출국할 때까지 끝끝내 여행용 체크카드를 찾지 못해 생긴 몇 가지 불편들을 떠올리며, 나는 여행용 물건을 두는 장소를 따로 지정해두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있었다(셀프 칭찬을 자주 하는 편). 그러다 문득, 여행용 물건을 두는 데 지금처럼 큰 서랍은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서랍두 개 때문에 캠핑 의자, 파라솔 등 옆에 둔 물건들을 넣고 빼기 어려웠는데, 큰 서랍을 비우고 작은 서랍으로도 충분히 지금 있는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사 후 처음으로 들었다. 귀국 후 감기로 골골거리면서도 큰 서랍에 있던 물건을 작은 서랍으로 옮기고, 큰 서랍은 당근으로 나눔하고 작은 서랍들은 팬트리나 드레스룸에 다른 자리를 찾아주었다.

서랍장을 빼기 전 vs 후

5월 24일 밤
아주 피곤했는데 잠이 잘 안 오지 않는 밤이었다.
6시가 다 되어서 마신 믹스커피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두 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두 번째 커피는 오후 3시 전에 마시기로 다짐했다.

이 다짐을 잘 지키다가, 귀국 이후 맞이한 첫 주말 토요일 오후에 다섯 시가 다 되어서 참지 못하고 커피를 한 잔 했고, 역시나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소싯적에 늦은 시간에 커피를 마셔도 잘 잤던 것은 그만큼 피곤해서였던 것 같다. 이제는 예전 같은 격무에 시달리지 않으니 늦은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말아야겠다.

5월 25일 아침

2024년 연초에 작성해 둔 목표를 읽었다.

나를 즐겁게 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지속하자는 부분을 읽다가, 육아휴직 중인 남편이 복직하기 전에 (남편이 아이들 하원 이후 케어해 줄 수 있을 때) 혼자 또는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제주올레를 걸으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5월 25일 오전

휴대전화로 당근마켓을 살펴보다가, 집 팬트리에 고이 모셔둔 빈 화분들을 나눔으로 비우자고 다짐했다.

5월 25일 음악을 들으며 누워있다가

여행 직전부터 오전에는 정제된 탄수화물을 먹지 않기로 다짐했고, 아침으로 토마토 등의 과일과 찐 고구마 등을 먹고 달달한 게 필요할 때는 커피에 초콜릿을 곁들였다.

여행에 와서는 그 다짐을 지키기 힘들었지만, 이 날 오전은 집 같은 숙소에서 다채로운 과일로 아침을 먹은 날이었다. 정제된 탄수화물을 먹지 않은 오전은 기력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의욕이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다. 기분이 괜찮다.

몸의 연료인 음식에 조금 더 신경을 쓰기로 다짐했고, 커피에 곁들일 괜찮은 초콜릿과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 점심으로 먹을 그래놀라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5월 25일

숙소 1층 식당 멀리건스에서 상큼한 라임주스를 마시며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라임주스가 참 더운 날씨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귀국하면 곧 여름이 될 테니,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에서 본 대로 레몬을 잘라서 얼려보자는 다짐을 했다.


(5월 25일에는 여유가 많았나 보다. 다짐을 많이 했다.) 

5월 27일

조호바루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이동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5시간 걸리는 버스에서 아들과 이어폰을 한쪽씩 끼고 케이팝을 나눠 듣고 있었다.

ADHD인 아들은 고속버스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내 부산하게 움직이거나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놀이를 했는데,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는 두 시간 동안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 너무 고무적이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커서 가만히 가요를 함께 들으며 버스를 타고 있다는 게 감개무량했다.

아들과 함께 노래를 들으면서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을 부유하다가, (뜬금없이) 최근 진행 중인 주식 단기 투자로 얻게 된 월수익의 10%는 기부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저작권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갑자기) 강력하게 솟았다.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이유로, 실패하는 것이 무섭고 싫어서 도전조차 망설이던 작사가, 에세이스트, 일상툰 등에 도전을 한 번 해보자! 실패해도 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라는 패기가 솟구쳤다.

5월 28일

쿠알라룸푸르 어학원에 근무하고 있는 사촌동생 찬스로 아이들을 어학원 일일 체험에 보내는 날이었다.

출발시간도 내 계획보다 늦었는데, 그랩(콜택시 비슷한 이동수단)마저 먼 거리에서 잡혀 그랩을 취소하고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허둥지둥 걷게 되었다. 날씨가 몹시 더운 말레이시아 길거리에서는 누구도 그렇게 서둘러서 걷지 않는다. 20분을 허둥지둥 걸었어도 여전히 지각이었고, 조금 늦었지만 특별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랩을 취소하지 않고 10여분 기다렸다가 탔어도 어학원에 도착한 시간은 비슷했을 텐데, 괜히 아침부터 더운 날씨에 바쁘게 걷느라 아이들도 고생하고 나도 안 해도 될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알라룸푸르 시내는 길이 막히는 편이라 언제 그랩을 불러도, 그랩이 오는 데 10분 이상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랩이 더디게 오더라도, 조금 늦은 것 같더라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지난 일본여행에서 동전으로 계산하느라 허둥지둥 동전을 헤아리는 나를 느긋하게 기다려준 종업원 아주머니를 보고 다짐했던 것을 또 잊어버렸다.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를 갖고 동하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느림도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자.

그래서 학원에서 하원한 아이들에게 '아침에 서두르라고 지나치게 독촉했던 일'을 정식으로 사과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들이 '자기가 아침에 늦게 준비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며 도리어 내게 사과 해왔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아이들에게 40분 동안 게임이나 유튜브를 보고, 20분 동안 쉬도록 했다. 비행기에서 아들이 화장실을 갈 때 처음에는 함께 화장실에 가주고, 문 잠그는 법 등을 알려줬는데, 아들은 두 번째로 화장실에 갈 때도 위치와 문 여는 방법을 기억하지 못했다. 눈앞의 현실이나 자기 행동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게임 유튜브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해롭다는 확신이 들었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허용시간 재설정이 필요하다 생각을 했다. 예전처럼 나와 남편이 상의해서 규칙을 발표할까 생각하다가, 매주 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고, 가족회의에서 서로의 논거를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 한발 떨어져 있을 때, 오히려 일상에 대해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좋은 업무 아이디어가 업무 시간 책상 앞에서보다 산책할 때나 머리 감을 때 잘 떠오르는 것처럼.

그래서 여행이 좋다. 여행 중일 때도 좋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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