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한진 Oct 18. 2021

가을 저녁, 말을 버리다

   마음이 번잡해지려 하면 나는 현관을 나선다. 

   주차장을 나와 이백 걸음쯤 가면 잎을 터는 은행나무가 서 있고, 모퉁이를 돌면 가을이 넘치는 들이 보인다. 하루의 볕이 노을로 잦아들고 어둠이 내리면 들은 커다란 성채가 되어 조용히 나에게 문을 열어준다. 개울 위 작은 다리 앞, 나는 잠시 멈추어서 자세를 추스른다. 

   한걸음,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다. 시간도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길을 비워 드리는 것. 말을 버려 마음속 수십 개의 목소리를 잠재우면 침묵으로 비워진 길 위로 소리가 다가온다.     


   지난여름 높고 거칠고 바빴던 소리는 낮고 부드럽고 여유로워져 있다. 쯔으 쯔쯔쯔 쯔으, 찌르르 칙칙, 스르륵 쓰으슥. 수십 개로 늘어나 우주로 오르던 신호는 뭉쳐 나의 귀를 파고든다. 쉐마(Shema),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내 안에 숨죽였던 목소리 하나가 문득 깨어난다. 나를 이끌던 소리가 썰물처럼 숨고, 서둘러 목소리를 재우면 돌아와 다시 나를 이끈다. 이청득심(以聽得心). 귀를 기울이면 소리 속 이야기가 마음으로 들어온다. 올해 여름은 부드러워서 벼가 더 잘 자랐나 봐. 내일은 추수하느라 온 벌판이 분주하겠어. 이야기가 점점 늘어나 들판을 가득 채운다.     


   누가 나를 슬쩍 건드린다. 벼 이삭과 놀던 바람이 아는 체하고 있다. 어깨와 뺨을 토닥인다. 거칠지 않고 경솔하지 않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넉넉함. 더운 이마를 어루만진다. 바쁘던 맥박이 조금씩 느려진다. 나는 편안하게 그에게 의지한다. 바람은 한 움큼 냄새를 쥐여 주고 들 위로 흘러간다.

   냄새 속에는 차곡차곡 그림이 접혀 있다. 농로의 마른 흙냄새 속에서 농약을 뿌리던 농부의 땀 냄새와 길 모서리에 들깨를 심던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버석거린다. 축사 지붕 위로 새끼를 부르는 어미 소의 울음이 내리고 농가 창문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두런거림이 흐른다.

   익은 벼의 냄새가 둑길로 이끈다. 어둠 속 저만치에 바닥 낮은 장 씨네 논이 보인다. 어느 여름, 장 씨는 물에 쓸려 버얼건 흙 가슴을 하늘에 보이고 누운 논 가에 앉아 망연함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늘 그 논에는 누런 벼가 가득히 바람과 어울려 어깨춤을 추고 있다.     


   함께 흔들리던 내 눈이 바람을 따라간다. 개울 건너 올망졸망한 불빛이 졸있다. 길가 나무를 어우르던 바람이 불빛 위 하늘로 오른다.

   검푸른 하늘은 회색 그라데이션을 땅으로 내렸다. 그것을 배경으로 누운 산등성이 위로 별이 기도처럼 쏟아진다. 기도에 젖은 산등성은 잠시 후 오른편 어깨에서 노란 등불 하나를 띄워 올린다. 내 마음도 잠시 함께 떠오른다. 오솔길이 하얗게 빛난다. 머뭇거리다가 그 길 위를 걷는다. 

   방향 없는 구름이 길을 어지럽힌다. 길을 막고 눈을 가린다. 수십 수만으로 나뉘었다가 서너 덩어리로 다시 뭉친다. 어지럽다. 부풀려서 하늘 한 편을 덮었다가 온 하늘을 가린다. 어두워진 마음에 빛이 사라진다. 걸음이 흐트러지고 아직 번잡함에 붙잡혀 있는 내 안 소리가 고개를 든다. 


   그래도 달은 구름을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몇 날 며칠 세상이 캄캄하고 비에 젖어도 그 어둠과 비의 훨씬 높은 자리 자신의 길을 말없이 걷는다. 그리고 어둠과 혼란이 지나면 흔들리고 주춤거리는 내 앞으로 돌아와 다시 길을 비춘다. 돌아보며 ‘괜찮아’ 낮게 속삭이며 미소를 지으면 나의 어지러움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다시 오솔길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     

   몸이 더워지고 손바닥에 온기가 돈다. 숨을 마신다. 공기가 살짝 젖어있다. 다시 들이쉰다. 깊은 가을이 내 속을 채운다. 입안에 침이 돌고 따뜻한 단맛이 목젖을 넘는다. 비우며 떠나서 채워져 돌아오는 가을 저녁. 동구 느티나무가 팔을 들어 축복하고 낮은 풀잎 위에 감사가 맺힌다.     

                                                                                                                                        <2021.10.17.>

매거진의 이전글 빙애기초록 어멍 조름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