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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ive Lore Wild Apr 04. 2023

소호의 비밀 정원

뉴욕 공공공간 산책 이야기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가든 (Elizabeth Street Garden)

Address: Elizabeth St, New York, NY 10012, United States



철망 너머로 보이는 정원


풀숲 뒤로 

전날 밤 연속적으로 보았던 신호등의 빨간 불이 마음에 걸렸던 아침이었다. 조용하던 사무실에 전화벨이 울렸다. 오피스 매니저는 직원들이 모두 출근해 있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장님이 한숨도 못 잔 얼굴로 들어와 회사 설립자인 디아나 발모리(Diana Balmori) 여사가 어젯밤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동료들과 놀란 마음에 같이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평소에 사랑방처럼 드나들던 사무실 근처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정원으로 갔다.


우리는 종종 앉았던 유리 테이블이 아닌 풀숲 한가운데 동그랗게 의자를 놓았다. 아무 말없이 있다가,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조용해지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호 끝자락 너머,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정원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무성한 풀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고, 길 너머 도시의 소란스러움도 막아 주었다. 

그날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풀꽃들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정원은 앉을자리가 하나도 없어 보여도 언제나 아늑한 공간이 남겨진 마음속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키만큼 자란 풀들 사이에 앉아있던 그 시간을 우리는 아직도 만나면 가끔 떠올리곤 한다.


튤립 밭에서 점심식사


점심 산책

보통 소호하면 명품상점과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들어선 거리를 떠올린다. 지난 시대의 번영과 쇠퇴를 겪고 난 이 거리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됨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 원주민을 대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잘 살펴보면 거친 공장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예술가들의 감성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호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할 때에는 잠깐의 산책이 허용되는 점심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울퉁불퉁한 코블 스톤이 깔린 도로에 자동차가 둔탁한 소리를 내고 지나가면 오래된 유럽의 길 같기도 했고, 주철 파사드에 매달린 비상 사다리는 길 위로 샤프한 그림자를 드리워 센티한 오후 풍경의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길에는 셀럽 같이 꾸민 사람들이 하루 종일 끊기지 않았다. 분명 그중에 몇 명을 유명한 사람이었겠지만 한 명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투박하고 오래된 건물 사이의 힙한 사람들 구경만으로도 점심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골목의 작은 가게들은 소호 거리에서의 시간을 더 알차게 만들었다. 매주 바뀌는 단골 책방 매대에서 새로 나온 디자인 책을 읽고는, 다음 코스로 누군가의 서재를 옮겨 놓은 듯한 문구점에서 공책과 펜을 구경하기도 했다. 차이나 타운으로 가는 길 막다른 골목 구석에 있는 빈티지 가게에서 옷을 입어보며 고민하는 날도 있었고, 디자이너 상점 샘플 세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점심을 굶고 들리기도 했다. 영국 찻잎 가게의 바에 서서 다양한 종류의 차 향기를 맡으며 차 한잔 하면 바쁜 하루를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매일 다른 골목으로,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상점에 들어가 보는 것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점심 마실의 꽃은 아무래도 도시락 뚜껑을 열 때였다. 주로 가는 점심 장소는 소호 골목길 끝에 있었다. 동료들과 디아나를 추억했던 풀꽃의 공간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정원이다. 

나름의 도시락 메뉴도 만들어 혼자 먹는 점심도 특별하게 만들어 보기도 하고 어쩌다 동료들과 같이 나오는 날이면 반찬보다 더 맛있는 수다를 떨었다. 봄 날에는 차이나 타운 꼬마 김밥집까지 가서 계란 김밥을 사 와 정원의 노란 꽃과 색감을 맞추기도 하고, 싱그러운 여름에는 밥 위에 아보카도, 크림치즈, 명란젓, 김, 어린잎채소를 섞어 비벼 먹는 것도 빠질 수 없는 메뉴였다. 햇살아래 살랑이는 풀숲에서 먹는 도시락은 어떤 반찬과 먹어도 방금 피어난 꽃 때문인지 달달했다.


풀밭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매일 달라지는 정원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정원은 여행으로 왔을 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프린스 스트리트(Prince Street)와 스프링 스트리트(Spring Street) 사이의 엘리자베스 길 한 중간에, 가게도 없는 벽을 따라 20m 정도 걸어야 입구가 나온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반대편 모트 스트리트(Mott Street)에서는 정원이 버려진 공터처럼 보인다. 흘깃 보면 야생화가 뒤덮인 폐허 같은 곳으로 호화로운 거리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군데군데 서있는 조각상들과 자연스럽고, 정성스럽게 관리된 화단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품이 깃들여져 있다.  비싼 땅 한가운데, 드러내지 않고 꾸민 듯 꾸미지 않는 소탈한 정원은 언제나 비밀스러운 휴식처가 되었다. 


공원으로 들어서면 잘 깎인 잔디밭에 놓여 있는 조각품과 조각품처럼 사이사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 절묘한 배치를 이루었다. 낡은 조각 기둥 앞 유모차에 앉은 어린아이와 엄마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언제나 돌 의자에 앉아서 일광욕을 하는 핑크 레이디 할머니를 통해 정원의 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부터 이어지는 넓은 자갈길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양옆으로는 풀숲이 우거진다. 사람들이 많이 밟은 곳은 길이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풀들이 자리 잡는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이 머무는 영역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풀꽃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일 룰 아래 각자가 앉고 싶은 자리에 의자를 옮겨 앉았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오늘이 있는 그런 정원이다. 


엘리자베스 정원의 봄 




https://goo.gl/maps/41c8DeSucAJ9LE9J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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