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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피스 May 05. 2020

하기 싫은 일이 있는 곳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대학원 시절, 심리학계에 대가라 불리는 한 노(老)교수님께서 어느 날 과제를 내주셨다.

'최대한 많은 감정단어를 찾아오되, 그와 정반대 되는 의미의 반의어도 함께 찾아올 것.'


애-증, 기쁜-슬픈, 행복한-불행한, 만족스러운-불만족스러운, 흥미 있는-지루한, 기대되는-실망스러운, 불편한-편안한, 두려운-안심이 되는....


나를 포함한 석사생들은 머리를 쥐어짜 양극단의 감정들을 찾아왔고, 교수님은 칠판에 그 단어들을 하나씩 적으며 우리에게 물으셨다.


'슬픔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행복이 무엇인지 알까?'


반대되는 두 감정이 하나의 직선 끝과 끝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있다는 의미였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처럼.


'정반대의 것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그 날의 깨우침은 내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싶은데 알 수가 없고, 어떤 것을 얻고 싶은데 얻을 수가 없고, 어떤 것을 찾고 싶은데 찾을 수 없을 때, 답은 그의 뒷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면 '하기 싫은 일'을 떠올려봐요.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라'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나도 그러고 싶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고, 주변에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놈의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적성과 흥미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나에게 찰떡같이 맞는 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무작정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경험을 쌓는데 필요한 돈과 시간이 너무 큰 기회비용일 수 있다. 등록금을 갚느라 알바를 두 세탕씩 뛰어야 하는 대학생에게, 수 십 차례 취업 실패를 겪고 있는 취준생에게, 회사에 다니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루의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는 직장인에게, 그런 말은 오히려 좌절을 준다.

  

그보다 좀 더 쉽게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기 싫은 일'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나는 똑같이 반복되는 업무에 쉽게 질려하는 것을 보고,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새롭고 더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보다 전례나 기존 방식만 고집하는 리더와 일을 해본 후,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잘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서 어떤 프로젝트를 끌고 갈 때 오히려 재미나 성취감이 떨어지는 걸 알고, 팀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와 반대인 사람도 있다. 이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는 업무에 변수가 자주 생기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에게는 반복적이고 정해진 시스템을 따르는 업무가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또 세부적인 것은 알아서 진행하길 원하는 팀장의 업무방식에 그는 불만이 많았었는데, 뭐든지 자기가 판단하고 결정하기 원하는 독고다이 팀장으로 새롭게 바뀌자 오히려 만족도가 올라갔다.


이렇게 내가 하기 싫었던 일, 맞지 않았던 방식과 문화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그 안에 '나에게 맞는 일'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을 찾았다면 큰 행운이지만, 찾지 못해도 괜찮다. 최소한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하지 않는 삶도 축복이니까.



| 찾았어요. 내 이상형.


"이상형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아무 말이나 내던지곤 했다. '없어요'라고 말하면 상대가 무안해할까 봐 '그냥 잘 웃는 사람이요', '다정한 사람이면 좋겠죠' 등 그때그때 생각나는 좋은 단어들을 내뱉었던 것이다.


그러다 최근 버스커버스커의 '이상형'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문득 나의 이상형이 스스로 궁금해졌다. '통통한 손목, 쪼글쪼글 팔꿈치, 어렴풋이 드러난 세 번째 갈비뼈'와 같은 그 노래의 가사처럼 나노 단위의 디테일은 아니더라도 '나는 ~한 사람이 좋아!'라고 명쾌하게 말하고 싶어진 것이다.


딱히 좋아하는 이성상은 안 떠오르니, 그와 반대로 내가 비호감으로 느끼거나 싫어하는 사람의 특징부터 나열해보았다 (한 20개는 더 있지만 스크롤 압박으로 생략하겠다).


-허세 부리는 사람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

-고집이 세고 우기기를 잘하는 사람

-털 끝만큼 손해보려하지 않는 사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만 하는 사람


그리고는 그와 정반대의 특징들을 하나씩 생각해보았다.


-허세 부리는 사람 →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

-자기보다 부족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 →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

-고집이 세고 우기기를 잘하는 사람 → 내 의견도 수용할 줄 아는 사람

-털 끝만큼 손해보려하지 않는 사람 →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만 하는 사람 →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그 정반대의 특징들을 조합해보니 놀랍게도 내가 그동안 심쿵했던 이성의 포인트들이 모두 담겨있었다. '솔직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고 여유 있으면서 긍정적인' 이성을 살아생전 찾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는 것에 나름 만족감을 느꼈다.


 




나의 '좋음'은 나의 '싫음' 안에 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내가 좌절감을 느끼는 그곳에 있다.

나는 그가 미운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알고싶을 때는 동전처럼 뒤집어보자.

정답은 그 뒷면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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