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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iebee Sep 14. 2020

할머님 포도주 한잔 하실래요?

내가 하는 서비스, 내가 받고 싶은 서비스

왕복 7시간 반의 인도 턴 비행을 끝내고, 휴가차 인천으로 가는 새벽 비행기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미리 싸놓은 짐을 손에 쥐고 공항으로 달렸던 날. 세 달 만에 한국으로 휴가를 가는 날이었다. 체크인까지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공항 구석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회사 앱으로 오늘 비행에는 누가 서비스를 하나 검색했다. 어...? 회사 입사 면접을 같이 봤던  A언니가 오퍼레이팅 하는구나! 괜한 반가움에 벌떡 일어나 언니 몫의 커피와 간식을 챙겨 다시 게이트로 향했다.

“언니! 이거 먹으면서 해요” 열심히 웃으면서 승객들을 응대하고 있는 A언니에게 쓱 커피를 내미는데, "니 왜 이리 자주 만나노!”하며 반겨준다. “아 인천 비행은 혼자서 다 하나봐-“ 하고 부러움 섞인 눈빛을 보내며 다시 내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사실 피곤했다. 몇 시간 전의 비행을 떠올리니 으-하고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이륙 2시간 전에 시작되는 브리핑, 비행기로 옮겨가 안전점검을 비롯한 승객 맞을 준비, 이코노미 300석을 꽉꽉 채운 승객들과  더 꽉 채워진 햇트랙 짐들...
그리고 승객 성함, 좌석번호와 함께 따로 실리는 100여 개의 채식 식사... 미처 주문하지 못한 베지테리안 밀을 요구하는 승객들과의 실랑이로 이미 너덜너덜해진 채로 도어 앞에 서서 “Thank you. Bye”를 기계적으로 읊으면서 한 생각이 ‘아 이제 반 왔다.... 돌아갈 때는 그래도 좌석이 20석 비니까...’였으니까 말 다했지.

좌석을 찾아 착석하자마자 능숙하게 담요를 펼치고 이어 플러그를 귀에 꽂았다. 그리고 기내 어메니티 파우치에서 핫핑크 색 스티커를 하나 쓱 꺼내 내 좌석 옆에 탁! 붙였다. ‘Do not disturb’ 그렇게 간단히 숙면 준비를 완료하고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잠들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와 코 끝을 맴도는 김치 냄새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안대를 슬쩍 벗어보니  아침식사 서비스가 한창이었다. 아 먹을까 말까 초점 없는 눈을 돌리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음료 카트를 끌고 저 앞에서부터 서비스 중인 A언니가 보였다.
“콜라에 얼음이나 레몬 필요하세요?”
승객 한 분 한 분과 눈을 마주치며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언니를 보고 순간 아차 싶었다. 아 보통 동료들은 서비스를 저렇게 하던가? 사실 나는 승무원 면접에서 침을 튀겨가며 면접관을 설득했던 그 초심은 이미 저 태평양 어딘가에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A언니의 친절함에 반해서 빤히 서비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갑자기 서비스를 하던 언니가 쑥- 하고 사라졌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 자리를 지켰다.
“할머님, 포도주 한잔해보시겠어요?”
바 카트(bar cart; 음료 서비스를 위해 준비된 카트) 앞 쭈그려 앉은 언니는 한 할머니와 눈을 맞추며 생긋 웃고 있었다.
“제 입맛에는 이 백 포도주가 더 좋았는데, 한 번 드셔 보셔요.”

아 한 방 더 먹었다.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다면 대부분의 승객들이 그렇듯 기내에 와인이 얼마나 다양한 종류로 실리는지, 어쩌면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셨을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익숙하지 않은 기내 서비스들을 먼저 읊으며 할머님께 와인을 먼저 추천해드렸을 테지. 그 마음이 너무 예뻐서 갑자기 코 끝이 찡했다. 우리 할머니께 저렇게 승무원이 서비스해줬다면 나도 참 감사했겠지? 언니 또한 같은 마음으로 저렇게 세심하게 여쭙는 거겠지. 나였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제시간에 빨리 서비스를 끝내기 위해서 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기내 복도를 달렸겠지. 앵무새처럼 “음료 하시겠습니까?”를 반복하면서..

​사실 출퇴근 길 본사에서 만나는 언니와의 첫마디는 항상 같았다.
“하니 니 아직도 다니나? 안 그만두나?”
“언니 저 진짜 그만둬야 할 거 같아요. 아 웃음이 안 나와...”
“아 내도 기회만 보고있다 아이가!”
아니 내 엄살에 항상 맞장구를 쳐주던 A언니였는데...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움이 휘몰아쳤다.

오늘의 나는 얼마나 웃으며 서비스를 했던가. 손님에게 먼저 다가가고 섬세한 서비스를 하겠다던 면접장에서의 다짐을 얼마나 지켰던가. 대단한 위인전과 자기 계발 서적을 줄줄이 읽어가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새삼 깨닫는다. 내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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