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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신 Jan 24. 2019

[이전글] ‘한겨레’의 사스마와리에 반대합니다 2

나무와 가시덩굴

<미스핏츠>, 2015년 6월 30일 게재.


<한겨레21>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 잘 알겠습니다. 안수찬 편집장은 <한겨레21> 1067호 칼럼 ‘나무’에서, ‘규준’ 역할을 하는 저널리즘스쿨을 토대로 새 저널리즘 교육 생태계를 마련하고 이를 진앙지로 해 좋은 기자, 좋은 언론을 만들자는 비전을 밝혔습니다. 서구 선진 언론처럼 “실력을 갖춘 이를 검증해 선발 – 좋은 언론 – 사회적 신뢰 구축 – 다양한 수익 구조 창출 – 더 많은 인재 채용”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장을 비롯해 일선 기자들의 오랜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일 것입니다. 미래의 숲을 바라보며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마음, 존중합니다. 응원합니다.


느슨한 고리


다만 저는 저 연결 고리에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느슨한 지점이 한 곳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력을 갖춘 이를 검증해 선발’했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언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고리는 결코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 ‘인터스텔라’의 영역입니다. 아무리 실력 있고 훌륭한 인재를 선발한다 해도, 기성 언론의 구조적 부조리에 포섭돼 버리면 좋은 기자로 성장할 수 없고 당연히 좋은 언론도 만들 수 없습니다. 촉망받던 젊은 피도 그저 잘 교육받은 적이 있는 기레기가 되거나, 술 취한 세상에 혼자 깨어있는 이로 고립될 뿐입니다. (아니면 돈키호테처럼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국 언론에서 기레기 되기의 핵심 ‘통과의례’인 ‘사스마와리’ 제도가 계속 존재하는 한 ‘좋은 인재-좋은 언론’의 중간 고리는 들풀처럼 끊어져 버리기 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래 저널리즘의 푸른 숲도 좀처럼 우거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스마와리의 목적?


안 편집장마저 사스마와리에 대해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시니, 그 전근대적인 제도가 아직까지 시행되는 데는 정말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사의 무게’입니다. “작지만 예민하여 휘발성 높은 것을 무수히 촘촘히 잘 배열해야 기사의 무게가 형성”되고 “좋은 기사는 좋은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의) 장인만 만들어낼 수 있”기에, 그 엄청난 일을 입사 석 달 된 기자가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기자들에게서 사스마와리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그럴 듯한 말을 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가 팩트에 대한 강박을 배우고, 기사 쓰기의 기본기를 익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학생 물이 덜 빠진 샌님에게 어디서든 취재할 수 있도록 배짱을 심어주고, 반대로 기자가 됐다며 기고만장한 풍운아에게서 바람을 빼는 일도 필요하다는 말 또한 들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필요와 목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반드시 사스마와리라는 반인권적인 관행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령 많은 인터넷매체와 독립·대안언론, PD저널리스트들은 소위 사스마와리 제도를 운영하지 않고도 무게 있는 기사를 써내고 의미 있는 언론 활동을 펼칩니다. 이들은 (비록 아직 부족할지라도) 나름대로의 수습기자 교육을 개발해 시행하면서 제 몫을 다하는 기자를 길러냅니다.

우월감을 위해서 신입들을 굴려야 한다면…


그러므로 사스마와리를 거쳐야만 제대로 된 기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주류라고 불리는 몇몇 매체들의 해묵은 우월감에 불과합니다. 좋은 기사를 써내는 장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짧은 사스마와리를 거쳤는지 여부가 아니라, 기자가 된 후 얼마나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단련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대중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저널리스트로 꼽히는 손석희 앵커, 최승호 앵커, 주진우 기자 등이 사스마와리를 거치지 않은 아나운서, PD, 주간지 출신이라는 사실은 의미가 있습니다.)


크게 잃는 것


또한 사스마와리는 얻는 것에 비해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큽니다. 수습기자가 오랜 관습에 파묻혀 구조적 부조리에 무감각해지면서 ‘대권력’에 맞서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스마와리 기간 수습기자는 경찰서 등 관공서를 돌며 생전 접하지 못한 권력과 대거리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과 대등한 눈높이에 서고 잘잘못을 들춰내면서 장차 권력과 맞설 잔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같은 기간 수습기자는 전화기 너머 앉아있는 선배와 그 뒤에 버티고 선 회사라는 조직 앞에서는 그야말로 찍 소리도 못하는 생쥐 꼴이 되고 맙니다. 한쪽에선 어느 곳에 누구에게도 쫄지 말고 당당하라고 배우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지극히 반인권적인 명령과 불합리한 관습에도 철저하게 순응하는 이중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스마와리 시절 생겨 버리는 또 다른 ‘유리천장’, 바로 기성 언론의 부조리다.


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 오늘날 많은 기자가 자신과 별 관련 없는 ‘중소권력’을 대할 때는 꽤 용감하게 굴면서도, 저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대권력’ 앞에서는 한 없이 비굴해지는 행태의 원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벼룩은 원래 60cm 이상을 뛸 수 있지만 높이 30cm 짜리 유리컵 안에 가두면 딱 그 정도 밖에 뛰지 못하고, 나중에 컵을 치워도 계속 그 정도 언저리까지만 뛰게 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성 언론의 부조리에 굴복해 버린 기자 역시 원래는 훨씬 높게 뛰어오르고 창공을 날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눈치 보며 적당하게 뛰어올라야 하는 공간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 민주주의 전체에 돌아갑니다.


사스마와리의 ‘다른 목적’


그러므로 저는 사스마와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가학적인 제도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먼저 대내용 목적은 수습기자를 어떤 상황에서도 회사에 충성할 수 있는 굳건한 조직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잠을 안 재우고 욕설을 날리고 노동에 합당한 보상을 주지 않아도, 그리고 훗날 정의와 진실에 반하는 기사를 쓰도록 요구해도 조직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길들이는 것이죠. 이는 고통의 의례를 통해 맹목적인 충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조직폭력배의 ‘손가락 자르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과격한 표현을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으로 대외용 목적은 구성원들이 겪는 극한 고난과 인내를 선전하면서 일종의 권위와 우월감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기자는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과 달리 전문교육 과정이나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오롯이 직무수행 성과와 공적 책임완수를 통해 권위를 얻어내야 하는 직종입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한국 언론이 그렇게 확실한 신뢰를 받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언론은 그 벌어진 간극을 바로 가학적인 수습기자 교육을 통해 메우려 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들이 이처럼 혹독한 수습과정을 거치는 만큼 보다 전문적이고 권위 있는 직종으로 여겨달라고 호소하고, 또 사스마와리를 시행하는 언론을 그렇지 않은 언론보다 더 우월하게 대우해달라고 주장하는 식으로 말이죠.


흠…사스마와리의 목적이…그러니까…


저는 한국 주류 언론이 대중매체(심지어 해외 언론까지)를 통해 사스마와리를 아주 자랑스럽게 보도하고 묘사하는 태도에서 그러한 의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자학을 통해 상대의 기가 질리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조폭들이 흉기로 ‘배 긋기’를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역시 과격한 표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진정으로 조직을 따르는 구성원을 만들기 위해 권위주의와 공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습니다. 인격적인 선배들이 실력을 바탕으로 진정한 저널리즘을 구현하고 회사가 이를 유무형으로 든든히 뒷받침해 준다면 신입기자들은 저절로 조직에 마음을 내어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근력이 단단하고 기술이 탁월한 진짜 싸움꾼은 결코 자학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쏠’ 뿐입니다. 언론이 쟁쟁한 권력‧자본의 면전에 용감하게 펜과 마이크를 들이댄다면 세간의 권위와 인정은 자연스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단 한 걸음


물론 당장 사스마와리를 폐지하고 번듯한 입사 후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여러 현실적인 여건에 가로막힐 수 있습니다. 안수찬 편집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은 신입 기자가 ‘공적 책임을 지는’ 취재와 보도를 하지 않고 그 훈련과 교육에만 매진”하는 것인데, 한국 언론 시장의 수익이 악화하는 가운데서 그런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언론 역시 ‘먹고사니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일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경제적 이유로 “인격과 인권을 유보시키는 수습기자 교육 체제를 여전히 운용”하는 행위를 허용할 수 있다면,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미뤄놓은 독재자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회사의 효율성과 수익을 위해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거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재벌의 행태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겨레>만큼은 이러한 논리를 단호히 배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척박한 현실을 고려한다 해도 단 한 발자국의 전진은 이뤄낼 수 있습니다. 당장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기 어렵다면, 지금 시행하고 있는 것에서 반인권적·비인간적·불법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수습기자로 하여금 경찰서 등 다양한 취재현장을 돌아보게 하되 충분한 수면·휴식 시간을 보장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등 환경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다른 실험도 충분히 해볼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수습교육 때 사스마와리를 시행하지 않고 마지막 1개월 정도는 자유로운 기획기사를 쓰는 기간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사IN>은 최근 수습기자들이 ‘최저임금으로 한 달 살기’에 도전한 후 르포기사를 쓰고 게임 저널리즘을 구현해 냈습니다. 비록 일간지와 비일간지라는 차이가 있고 이런 시도들이 완벽하진 않다 할지라도, 사스마와리라는 공고한 관행에 변화를 주는 데는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잠도 못잔 상태에서 선배에게 쌍욕을 듣고 한숨짓는 것보다는, 생전 처음 써야하는 특별기획을 떠올리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가난의 실체를 체험하며 가슴을 치는 일이 훨씬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혁신이 누적된 끝에 등장할 결과”가 아니라 ‘연쇄적인 혁신을 부르는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과제, 당신의 과제


기자 지망생을 향한 안수찬 편집장의 조언,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성 체제에 편입된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 기자 지망생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언론 개혁 운동’ 벌이기 ▲ 새로운 방식의 언론을 선보이는 ‘내부 혁신자’ 되기 ▲ 대안언론, 독립언론, 프리랜서 기자 등 다른 가능성 탐색하기 ▲ 저널리즘의 규준과 원칙을 깊이 고민하는 공부하기 등을 제시해주셨습니다. 한국 언론에 깊이 절망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언론인 지망생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험한 취업난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우려 속에 있지만, 저 역시 저 중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서 저널리즘 혁신과 제 꿈을 조화시키는 길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예비 언론인들이 지금과 다른 저널리즘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하듯, <한겨레> 같은 신뢰받는 기성 언론도 기존의 관행과 관습에 안주하지 말고 보다 과감한 혁신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사실 한국 언론에 대한 절망의 순도는 저 같은 애송이보다 안수찬 편집장과 주위 기자들처럼 최일선 현장에서 변화를 위해 애쓰는 분들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을 향한 노력을 보여주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려는 비전을 제시해준 데 대해 존경을 표합니다. 부디 그 경주에 더 박차를 가해주십시오. 좋은 인재들이 저널리즘스쿨과 개별 노력, ‘좋은 기자 프로젝트’ 등을 통해 미래 저널리즘의 고귀한 씨앗을 품게 되었는데, 막상 기성 언론에 입사해 온갖 부조리‧불합리와 맞닥뜨리며 ‘멘붕’에 빠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좋은 열매를 맺고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울 큰 나무, 분명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명한 농부라면 자신이 뿌리는 씨앗이 진정 생명을 움트리라 믿으며, 땅을 뒤덮고 있는 가시덩굴을 미리 걷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붉은 토양이 드러나야 비로소 그곳에 따사로운 밀양이 비추고 바람이 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씨앗이,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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