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시요일 낭독회
십일월에는 좀 더 특별하게 시 한 편과 그림 한 점을 감상하기로 했다. 나는 그림 하면 먼저 베르메르의 ‘우유 따르는 여인’, 고흐의 ‘밤의 테라스’, 로렌스 알마 타데다의 ‘기대’가 떠오른다. 그래서 이 그림들 중 하나를 같이 감상할까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밤의 테라스는 언젠가 모임 중에 언급한 적이 분명히 있었고, 베르메르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나누다가 그림을 같이 찾아본 적이 있었다. 로렌스 알마 타데다의 ‘기대’는 뭐랄까, 왠지 모르게 십일월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려보다가 새롭게 라우릿츠 안데르센 링을 알게 되었다.
라우릿츠 안데르센 링은 농촌의 소박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덴마크의 국민화가다. 가난한 목수인 아버지외 농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우릿츠는 예술가의 꿈을 키우며 당시 서민들이 갈 수 있는 유일한 예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예술학교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덴마크 최고의 왕립 미술학교에 추천해 주었지만 당장 작품에 쓰일 실용적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라우릿츠는 따분한 미술 고전 이론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 상류층 학생들의 무시와 따돌림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퇴하고 만다.
그는 처음에 농민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시사하는 그림들을 그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면 농민들의 삶이 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림 한 점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는 환멸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 즈음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3년 후에는 그의 형이 스스로 유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깊은 우울증에 걸려 힘들었던 그는 친구 부부와 시간을 자주 보냈는데, 따뜻한 성품을 가진 친구의 아내를 몰래 짝사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꽁꽁 감추었던 그의 마음을 소설가 헨리크 퐁토피단이 알아챘다. 헨리크는 라우릿츠를 소재삼아 소설을 발표한다. 라우릿츠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소설 주인공이 라우릿츠라는 걸 알 수 있게 똑같이 묘사했으며, 심지어 주인공을 실력없는 화가로 설정해두기도 했다. 라우릿츠는 큰 충격에 빠져 헨리크와 친구 부부와 모두 관계를 끊고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우릿츠는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던 친구의 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둘의 사랑은 마침내 부부의 연으로 이어졌고 그 이후 라우릿츠는 아내를 화폭에 자주 담기 시작했다. ‘황혼 타일 난로 옆의 작가의 아내‘, ‘램프: 화가의 아내’, ‘아침 식사 중에‘등. 북유럽은 일조량이 적은 나라인데, 그가 그린 아내의 그림들은 모두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거나 난로의 불그스름한 장작불이 느껴진다거나 램프의 빛이 화폭을 따뜻하게 감싸는 분위기를 준다. 아마도 아내와 함께하는 순간이 그에게 진정한 사랑의 온기와 평안함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회원들과 함께 감상한 그림은 ‘아침 식사 중에’다. 편안하고 일상적인 그림 속에서,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편의 꿀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진다.”는 분의 말씀에 다들 마음이 간질간질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relaxation 편안함, 안정감”이 느껴진다는 감상이 제일 많았다. 라우릿츠의 삶 속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이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행복은 특별한 순간에 있지 않다. 평범한 아침식사시간, 그 순간 들어오는 찰나의 햇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를 마시는 소리, 그릇 달그락 거리는 소리, 잠시 신문이나 책장을 넘기는 소리 등등이 짧지만 다정한 대화처럼 행복감을 충전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서 소박한 일상이 가지는 안정감과 따뜻한 일상의 힘, 다정한 시선들이 느껴진다.
그림에 이어서 함께 읽은 시는 박소란 시인의 ‘돌멩이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참 많은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돌멩이는 누구일까’ ‘혹시 나 자신일까’ ‘그리운 누군가일까’ ‘돌을 사랑한다는 감정은 무엇일까’ ‘사랑은 피를 흘리는 것일까’ ‘견딜만한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마음을 겪어보았나’, ‘아무리 사랑하려해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나’, ‘어쩔 도리가 없는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나만의 팁이 있는가’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 십일월에도 마음을 이야기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 낭독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말이지, 시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정말로 어쩔 도리가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