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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저녁, 고양이 같은 우리들의 결심

by 양윤미

빨간 신호에 차를 세웠다. 붉은 신호등만큼 단풍나무도 붉어지던 가을 저녁이었다.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쌀랑한 가을 바람에 옷깃을 좀 더 추켜세웠고, 누군가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깊이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서른 살 즈음이었던가. 그 때 가을, 나는 서울을 자주 오갔다. 서로의 소설을 읽고 합평하는 용감한 작가들 모임이 서울에 있었고, 이십 대 후반에 만났던 뮤지컬 배우 친구가 서울에서 공연을 했고, 또 그런 이유따위 없더라도 새로운 볼거리가 많은 곳이 서울이었다. 쌀랑한 바람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서울을 오가던 그 해가 드문 드문 떠오른다. 문득, 서울 광화문 글판에서 보았던 글귀가 생각나 뭉클해졌다. "괜찮아, 바람 싸늘해도 사람 따뜻하니."


시요일 멤버들이 시요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따뜻해서'일 것이다. 워낙 따뜻한 분들이어서 시요일을 오는 건지, 시요일을 오다보니 더욱 따뜻해 진 건지 전후관계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나의 시적 여정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시를 정기적으로 읽고 시가 가진 힘을느끼는 이 따뜻한 모임을 계속해서 잘 유지해 볼 생각이다.


일찍 오신 분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모습이 다정해서 창 밖에서 몰래 스냅샷을 찍었다. 몇 초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 어떤 평가도, 그 어떤 판단도, 그 어떤 예단도 없이 응시하고 있던 순간이 좋았다.


비폭력 대화라는 책에 '관찰'에 대한 멋진 정의가 나온다. “평가가 들어가지 않은 관찰은 인간 지성의 최고 형태다. -크리슈나무르티-” 오늘 읽을 첫 번째 시, 존 모피트의 "어떤 것을 알려면"이라는 작품 역시 바로 이러한 관찰과도 맞닿아 있었다.


어떤 것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알고자 한다면 오래도록 바라보아야 한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오래도록 관심을 두어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잎사귀들 사이의 작은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관찰이 무엇일까? 그걸 알 수 있다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 고요 속으로 들어가보기 위해 동네 뒷산에올라, 꽃이나 나무, 새의 지저귐을 바라본 적 있다면 당신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 피어나는 꽃과 지금 이 순간 자라나는 풀잎들, 지금 이 순간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개를 펴 날아가는 새들을 오래 응시하면 알 수 있다. 내가 마치 저 꽃과 같구나, 내가 마치 저 풀잎과 같구나, 내가 지금 저 새처럼 열심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숨을 쉬고 있구나 라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의 생의 충만함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권태와 환멸의 줄다리기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면 평화를 만나러 나가야 한다. 집 앞 놀이터든, 동네 산책로든, 어디든, 바깥으로 나가 어느 벤치에든 앉아 존 모피트의 "어떤 것을 알려면"을 조용히 낭독해야 한다. 우린 지금 여기에 참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있다.


두 번째 시는 김경미 시인의 "오늘의 결심". 읽자마자 모두들 시가 너무 어려워서 어떤 마음인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도대체 비관없는 애정의 습관이 무슨 뜻인가요?"라는 질문에 다들 웃었다.


시 속 화자는 지나간 세월 속에서 크고 작은 여러 파도에 많이 휩쓸렸던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제는 그 모든 일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었지'라고 덤덤하게 추억할 수 있는 중년 같달까. 사회생활을 어느정도 해볼만큼 해본 분, 어릴 때는 신나서 밤새 노래하며 춤췄겠으나 이제는 적당한 균형을 추구하며 즐기는 분, 사람을 향한 넘치는 애정 때문에 잦은 서운함을 느꼈었으나 이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친절함으로써 편안한 사이를 추구하게 된 분 같다.


화자는 썩은 치아 같은 실망이 찾아오면 꼭 치과에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마치 꼭 해결하리라는 의지표명이라기 보다는 '실망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대도 괜찮아'라는 의미로 들린다. 가만히 있는 창틀 먼지에 다쳤던 건, 사실 화자의 오해였을 지도 모르고, 자신의 혀를 깨문 건 화자 자신의 어금니였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뭉클했다. 우린 모두 완벽하지 않은 서툰 인간이다. 나의 실수로, 나의 오만함으로, 나의 삐딱함으로 나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낸 순간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고양이처럼 살아가보자. 내 발목보다 가느다란 담벼락같은 인생을 살금살금 걸어가보자. 웃다가 울다가 담벼락에서 잠시 떨어져도 괜찮다. 고양이같은 우리들은 낙법을 체득해 두었지 않은가.우리에게 필요한건 그저 "비관없는 애정의 습관"이다. 사랑하는 습관만큼은 비관하고싶지 않은 고양이처럼, 오늘도 걸어가본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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