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나폴리 04
오전 폼페이 편은 다음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나폴리 지하에는 도시가 하나 더 있다. 지상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대 미항' 나폴리가 있고, 지하에는 2,400년된 고대의 '네오폴리스(Neopolis)'*가 남아있다. 도시 위 아래에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져 이 곳, '나폴리 지하도시(Napoli Sotterranea; Naples Underground)'에 방문해 보기로 했다.
*네오폴리스(Neopolis): 신도시
나폴리 역사 지구의 거리는 매우 특색있고 생동감이 넘치는데요, 그 40미터 바로 아래에서 또다른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답니다. 시간에서 단절된 이 곳은 아직 채 탐험되지 못한 곳이에요. 하지만 지상 세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요. 이 곳이 바로 나폴리의 심장이자, 나폴리가 태어난 곳입니다. 이 곳으로 오시면 2,400년 전 과거로 여행하실 수 있어요. 네오폴리스의 건립부터 세계 2차 대전 폭탄의 흔적까지, 역사의 모든 대서사시가 이 곳의 노란 응회암 벽에 남아 있답니다.
- 나폴리 지하도시 웹사이트(https://www.napolisotterranea.org)
40미터 아래, 2,400년 전 과거로 들어가면서 가방에서 헤드폰을 꺼내 연결했다. 멜론 앱에 '스마트폰 세이브'로 저장해둔 곡을 재생했지만 경고창이 반환되었다.
몇 차례 다시 시도해보았지만 권한이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해 떴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고, 당장은 그저 뭐라도 듣고 싶었다. 멜론 대신 애플 뮤직 앱을 열었다. 그래도 '딸랑 한 곡'은 들어가 있더라.
'딸랑 한 곡'이 이렇게나 시기적절하다니. 흥미가 당겨 지하 도시까지 들어왔지만 실은 꽤 밋밋하던 차였다. 고고학 유적지 탐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폼페이에서도 나폴리 지하 도시에서도 '멋진 순간'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계속 '내가 오늘 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차에 3분 25초짜리 노래 한 곡이 반복 재생되며 답을 주었던 것이다.
픽, 웃음이 나면서 불평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지하 도시에서 나온 후로 한 두 시간 가량 헤맸다. 아이폰이 이제 위치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도 꽤 나중에야 알아차려서, 아이폰 위치 추적 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가 있었다. B & B*에서 얻어둔 종이 지도에 의존해 길을 찾았다.
*B & B(Bed & Breakfast): 침실과 조식을 제공하는 숙박업소의 일종. 이탈리아의 게스트하우스는 대체로 'B & B'라고 명명되어 있다. 조식으로 보통 빵과 커피 한 잔을 제공한다.
이제 몬테산토 역*으로 돌아가서 푸니콜라레*를 타고 보메로(Vomero) 언덕 위로 올라가면 된다. 오늘 마지막 일정으로 산텔모 성(Castel Sant'Elmo)에서 일몰과 야경을 볼 계획이었다. 한 두 시간 헤매긴 했지만 세 시 반이면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래도 비슷한 곳을 맴도는 바람에 아주 멀리 가진 않았고, 이제 여차 저차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몬테산토 역(Stazione di Napoli Montesanto)은 나폴리 역사 지구(historical center)에 위치해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시장과 상가에 인접해 있으며, 푸니쿨라레 정차역도 가까워 여행자가 머물기 편리하다.
*푸니콜라레(Punicolare): 산이나 언덕으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트램의 일종. 나폴리의 경우 도심에서 보메로 언덕 위로 운행한다.
멜론 재생 오류에, 위치 추적에, 아이폰 시계마저 이상했다. 바로 전에 세 시 반이어서 괜찮다고 나를 달랬는데, 다시 시계를 보니 네 시 반이라고 되어있지 뭔가. 스마트폰 시계가 마구잡이로 돌아간다니, 이런 오류는 듣도 보도 못했다.
지금이 세 시 반인지 네 시 반인지 알 수 없지만, 만약 네 시 반이면 일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져 있었는데, 아이폰에 문제가 있으니 머릿속도 복잡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메트로 단테 역에서 몬테산토 역으로 가는 길에 아이폰이 꺼져서 다시 켰더니,
곧이어 눈에 들어온 글자는 그야말로 점입가경.
도대체 뭐라 반응할 수도 없었다. 지금이 '1970년 1월 1일', 그것도 '새벽 1시 21분'이라는 생뚱한 시간이 찍힌 아이폰을 보며, 내 머리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아이폰이 정말이지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아서 우선 숙소로 돌아가 와이파이를 연결해보기로 했다. 몬테산토 역 근처에 묵기를 천만 다행이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직전에 근처 시장에서 물을 한 병 샀다. 주인 할아버지께서 좀 멈칫하시는 느낌이었는데, 곧 이렇게 말씀하셨다.
"50센트."
물 0.5리터가 1.8유로 정도니까, 1유로 쯤 깎아주신 셈이다. 또 선물을 받았다*. 1유로야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몹시 지쳐 있는 와중에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 정말이지 마른 목으로 샘물이라도 발견한 느낌이었다.
*여성의 날이라 1유로 깎아주신 듯하다. 상세한 이야기는 오전 폼페이 편 참조(4차원 시간 여행 (上): 폼페이 편).
나폴리 사람들은 '줄 서서' 친절을 베풀만큼 적극적으로 친절하거나, 뚱하고 부루퉁하거나, 도시 사람처럼 무관심해보이거나 셋 중 하나다. 그래도 로마같은 대도시와 비교하면 첫 번째 유형이 꽤 잦다. 참 좋다.
숙소에 도착해 '문제의 아이폰'을 와이파이에 연결했다.
날짜도 시간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멜론 곡 재생도 다시 잘 작동한다. 얼른 신곡 하나를 다운받았고, 곡 재생을 시작하면서 다시 B & B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으윽, 신곡을 채 반도 듣기 전에 아이폰이 또다시 꺼지고 말았다. 다시 켜보니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냥 가야지, 뭐. 숙소에 들르느라 이미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고, 날이 벌써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또다시 ‘재생 권한이 없어진’ 멜론을 끄고 ‘딸랑 한 곡’을 다시 틀었다. 역시 이 노래는 ‘픽’ 웃음이 나오게 한다.
*사운드클라우드에 발표된 딘(DEAN)의 <Here & Now ft. Mila J (esta. Remix)>. 'Enjoy the here and now(지금 여기 이 순간을 즐겨).’는 그 가사의 일부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푸니콜라레*에 올랐다. 계단 여기저기에서 객차에 오르는 방식도, 장난감 같은 모양도, 심지어 승차감까지, 마치 놀이기구를 탄 느낌이었다.
남자 하나가 여자 손을 잡고 버스킹(?)을 하기도 했는데, 맨 앞에 서서 노래를 하고는, '조금 전 결혼했으니 축의금을 조금씩 주셨으면 좋겠다' 하더라. 굉장히 수줍어하는 느낌이었는데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푸니콜라레 좌석은 계단처럼 되어 있어 좌석이 모두 한 방향을 보게 되어 있다. 좌석에 앉은 사람을 기준으로, 언덕 위로 올라갈 때는 역방향으로(뒤로), 내려올 때는 정방향으로(앞으로) 움직인다. 에스컬레이터를 열차로 만든 거라고 생각하면 연상이 쉽다.
상행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기분이 어찌나 이상하던지. 롤러코스터나 후룸라이드를 탈 때 맨 처음으로 고지를 향해 느릿느릿, 아주 높이 올라가지 않나. 몸이 이 기억을 상기했는지 잔뜩 긴장했다. 동시에 이 새로운 경험에 신나고 흥분되기도 했다.
새로운 방향의 움직임은
마치 기억을 거꾸로 되돌아 가는 듯
신선한 느낌을 줬다.
정말로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차에 역방향으로 앉아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푸니콜라레는 직선 위가 아니라 언덕 위를 오른다. 뒤통수 뒷편, 위쪽 어딘가에서 저 아래 발치 앞쪽으로 주위 풍광과 터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새로운 방향의 움직임은 마치 기억을 거꾸로 되돌아 가는 듯 신선한 느낌을 줬다. 정말로 시간이 역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폼페이*와 나폴리 지하 던전에서처럼, 아이폰의 날짜 오류처럼.
*폼페이 부분에 관한 상세 이야기는 오전 폼페이 편 참조(4차원 시간 여행 (上): 폼페이 편).
푸니콜라레를 타고 도착한 ‘달동네파크’는 아랫동네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경치가 좋아서인지 좋은 집과 고급 식당들이 많아보였다. 저녁을 여기서 먹을 걸 그랬나, 생각했다.
좀 걸어서 곧 산텔모 성에 도착했고, 사진을 찍으려고 아이폰을 꺼냈다. 또 꺼져있었다. 그리고 젠장, 다시 켜지지 않았다. 이젠 사과 마크조차도 뜨지 않았다. 그렇게 산텔모 성곽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아이폰이 완전히 기절했다. 밤에도 빛을 뿜어내는 듯한 검푸른 지중해와 나폴리의 밤하늘을 단 한 컷도 찍지 못했다. 단 한 컷도.
푸니콜라레를 타고 몬테산토 역으로 돌아 내려가는 길은,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오늘 하루를 채운 이 신기한 시간 여행을 돌아보면서, 어쩌면 저 아래에선 아이폰이 다시 괜찮아질 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오늘은 하룻밤 마법으로 이루어진 시간 여행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몬테산토 역에 도착해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폰 전원을 다시 한 번 눌러보았다. 전원이 들어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