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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브릴 Jul 08. 2019

피렌체의 얼굴들, 그러나 까페

세계일주 에세이 | 이탈리아 피렌체 02







:: 1 ::


친구에게,


밀라노의 밤이야. 여기 이탈리아 문화 최고의 집결지인 것 같아. 로마와 피렌체, 남부 해안, 지난 스무 날동안 이탈리아에서 본 모든 모습이 이 곳에서 뒤섞여 현재를 이루어낸 것 같아.

그런데 또 여기에서 최고로 압축된 '피렌체의 얼굴' 하나를 만났어. 오늘 종일, 대도시에선 결코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다정함들을 만났는데, 오후 여덟 시도 넘어서 만난 그 '피렌체의 얼굴' 하나 때문에 결국은 울어버렸네. 그 후로도 고작 한 두 시간 만에 세 번이나 아주 다정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래도 참 울적하다.



피렌체에서 <칸딘스키~폴락> 전을 하고 있어서 그저께 가서 봤어. 이 두 작품 모두 거기 있더라구. 저 왼쪽 작품* 말야, 미술관 조명이 노란 불빛이라서 아주 다른 느낌을 줬어. ‘회색 위에 검정’이 아니고, ‘골드 위에 검정’. 사람 키만큼 큰 그림이어서 그 앞에 서 있으니까 꼭 달 위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원래는 회색. 그리고 나도 오늘은 회색, 오른쪽 그림*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마음이 많이 어지러운 색.

*마크 로스코, 무제(검정 위에 회색), 워싱턴 국립 미술관, 1970

Mark Rothko, Untitled (Black on Grey), National Gallary of Art, Washington, D.C., 1970

*파블로 피카소, Half-length Portrait of a Man in a Striped Jersey(줄무늬 져지를 입은 남자의 초상),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1939

Pablo Piccaso, Buste d'homme en tricot raye, Peggy Guggenheim Collection, 1939




:: 2 ::


(하루 전)


원본 출처: 카페 질리 웹사이트(https://caffegilli.com)


이 도시에서는
시민들보다 그림과 조각, 건물들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당초 일정에 이틀을 추가해 피렌체에서 일주일을 지냈지만, 내내 마음이 어둑했다. 대부분 날씨도 좋았고, 기온도 20도까지 이르며 4월이 찾아왔음을 알렸지만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미술품과 건축물을 제외하면 피렌체에서 행복을 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 사람들은 대체로 몹시 무뚝뚝하고, 심지어 불친절하거나 짜증 섞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피렌체 르네상스 미술품들 속 성직자들의 모습처럼 완고하고 심각한 표정에 행복과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관광객이 아니면 제대로 운영되는 산업이라고는 없을 듯한데도, ‘관광객이 정말 너무 많아, 끝없이 줄을 서 있고 너무 힘들어, 지겨워, 어쩌면 이렇게 끝도 없이 찾아올까’라고 불평하는 듯한 얼굴이다. 물론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특히 그렇다. 사람들 외에 음식이나 입장료, 숙박 시설 등, 모든 면에서 관광객이란 그저 수입원일 뿐, 이라는 듯한 도시다. 여기 사람들은 살기 힘든가봐, 생각이 들고, 이 도시에서는 시민들보다 그림과 조각, 건물들이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탈리아 남부의 친절이
상업적일 거라는 생각으로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니.


여행자로서 느끼는 피렌체는 최악이다. 지내는 내내 마음에 그림자가 졌다. 한 하루 이틀 즈음은 내내 거리와 미술품들 사이를 배회하면서 마음 속으로 싸움을 했다. 피렌체 사람들과, 그리고 곧이어 마주하게 될 파리 사람들과. 마음 속 그림자에서도 가장 어두운 부분에 화(火)가 자리해 있다.


이탈리아 남부의 친절이 상업적일 거라는 생각으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니. 진심이든 의례적인 행동이든, 분명 친절한 것이 더 좋은 것임을 뼈져리게 느꼈다. 카프리*에서는 괴로운 하룻밤을 달래주는 이웃집 부인의 친절이 낮에도, 저녁에도, 심지어 아침에도 이어졌다. 그것이 얼마나 부드럽게 내 마음을 녹여주며, 쓴맛나는 여행에 달콤하고 따뜻한 봄이 되었던가.

*카프리(Capri): 나폴리 만(灣)에 위치한 섬. 유명한 관광지이며 카프리 맥주로도 유명하다.


출처: Flawless Firenze (https://firenze.flawless.life)


피렌체의 Caffè Gilli(카페 질리)는 1733년에 문을 연 아주 오래된 곳이다. 그러나 그 명성과 고급스러운 자태에도 불구하고, Gilli는 그저 피렌체의 한 카페에 지나지 않는다.


카페에 들어서자 자리 안내는 커녕 인사를 하는 이도 없다. 심지어 적당히 자리 잡고 난 후 5분이 넘게 지난 후에야 누군가 말도 없이 메뉴판을 테이블 위로 쓰윽 밀어넣고 딴 곳으로 가버린다. 잠시 후 피렌체의 얼굴 하나가 나타나 눈이 부실 때나 짓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인사를 하고 허공을 보며 주문을 받는다. 그러고 나면 다른 피렌체의 얼굴이 커피와 티라미수,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기능하듯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물론 피렌체의 얼굴은 냅킨 서너 장과 영수증이 든 통은 잊지 않고 놓고 간다.



#CaffeGilli #테이스팅노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Gilli의 커피 한 잔은 피렌체 한가운데 뜬 기쁨의 섬과 같다. 물 한가운데 떨어진 한 방울의 기름처럼, 이 한 잔의 카페 도피오는 피렌체의 그 어떤 얼굴과도 섞이지 않는다. 그 훌륭한 맛에는 피렌체가 몰고 온 그 모든 마음의 피로와 슬픔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 풍부하고 깊게, 어둑어둑한 저녁에 엎지른 듯 찾아온 아늑한 황금빛 액체. 약간의 신맛을 그러안은 풍부한 크레마 속으로 설탕 한 봉지 반을 쏟아넣고, 휘- 저은 후 잠시 뒀다 잔을 들어올렸다. 첫 한 모금 넘기고 나면 프레스코 벽화처럼 뚜렷하고 은은하게, 커피 향이 입안과 목구멍, 식도 벽을 덧칠하는 것이다. 찻잔 벽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 크레마처럼.



또다시 나는 이 곳에서
전통과 그 계승을 중시하는
유럽의 정신을 본다.


이탈리아에 온 이래 에스프레소를 재발견했다.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마시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난다. 심지어 라바짜나 일리를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것과도 다르다. 굉장히 부드럽고, 속이 아프지도 않다.


그러나 Gilli의 커피는 또다른 재발견이다. 이탈리아에서 가는 곳마다 에스프레소의 르네상스를 맛보았다면 이것은 그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이리라. Gilli 커피에는 오만해도 좋으리만치 과연 그 역사와 명성을 자랑할만한 놀라운 특별함이 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이 곳에서 전통과 그 계승을 중시하는 유럽의 정신을 본다.


원본출처: (좌) 로토파고이족으로부터 동료들을 떼어내는 오디세우스


일주일 내내 피렌체 어느 곳을 가도 미술품과 건축물, 따뜻한 햇살만이 나의 벗이었다. 이 씁쓸하고 차가운 피렌체 한가운데에서, Gilli의 커피는 따뜻하고 향미롭게, 달콤하고 부드럽게, 한 모금 한 모금 행복을 준다. 한 잔의 커피가 놓인 이 사각 테이블은 피렌체 한가운데 떠있는 로토파고스 섬*과도 같다. 이탈리아에서는 자판기 커피조차 맛이 좋았기에 특별히 유명한 카페테리아를 찾아다닐 생각일랑 하지 못했건만. 이탈리아를 떠나기 이틀 전 오후에서야 약간의 후회와 아쉬움이 인다. 피렌체에 그리운 것이 남는다면 바로 이 커피 맛이리라.

*로토파고스(Λωτοϕάγος / Lotophagos) 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가상의 섬. 이 섬의 로토파고이 부족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에게 신비의 열매 '로토스(lotus)'를 대접한다. 일행은 로토스를 먹은 후 세상의 고통과 시름을 모두 잊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메인 이미지 원본 출처: Pablo Picasso, Half-length Portrait of a Man in a Striped Jersey, Peggy Guggenheim Collection, 1939 & Mark Rothko, Untitled (Black on Grey), National Gallary of Art, Washington, D.C.,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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