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 중에서
PLAY* 기억은 왜곡된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기억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 기억의 진실을 오염시킨다. 시간이 지나면서 번지고 옮겨지고 다른 식으로 조합되는 기억들.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티켓을 예매하면서 나는 낯익은 감독의 이름을 발견했다. 빔 벤더스. 부산국제영화제(PIFF). 그리고 네가 생각났다. 너에 대한 기억이 뒤틀린 채 찾아왔다.
REWIND* 그날 우리가 본 영화는 빔 벤더스의 밀리언 달러 호텔이었다. 그 시절 영화제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오류의 한 가지이지만 두 자리를 연석으로 예매했는데 그 두 자리가 앞뒤 자리인 경우가 있다. 그해 밀리언 달러 호텔을 보던 그때 너와 나도 그랬다. 그날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우리뿐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옆에 앉은 타인에게 죄송하지만 일행이랑 자리가 떨어져서 그런데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말을 너도 나도 하지 않았다.
REWIND* 무슨 일인지 모를 일로 기분이 상한 날 너는 나에게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 가지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그렇게 미래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 수 있냐고 했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고 했다. 그 말은 좀 심하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너의 충고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PAUSE* 언제나 이길 것이 거의 분명한 만만한 것에게만 싸움을 거는 너란 인간과 나는 다르다. 그런 너에게 분명 나는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우스운 싸움 상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 모든 것과의 승부와 무관했던 나에게 너는 그렇게 싸움을 걸어왔고 나는 그 싸움의 끝을 알아챘다. 네가 내 앞자리에 앉아 밀리언 달러 호텔을 보던 바로 그 시간에.
PLAY* 수많은 불빛들로 밤이 사라진 LA 시내에 낡고 지저분한 호텔이 있다.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적응하지 못하는 부랑자 무리들이 사는 곳, 그곳을 사람들은 밀리언 달러 호텔이라고 부른다. 살인사건, 그리고 사랑과 배신. 순수 하나 머리가 모자라는 연인들. 영화는 어차피 혼자서 보는 거다. 둘이서 영화관을 들어서겠지만 느끼고 생각하고 보는 시선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그날 너는 너의 뒷자리에 앉은 나를 분명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뒷자리에 앉은 나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만 봐야 하는 나에게는 네가 잊히지 않았다.
STOP* 밀리언 달러 호텔이 끝나고 나는 혼자서 극장을 빠져나왔다. 자막이 모두 올라가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영화제 측의 주장 또한 깨끗이 무시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들여다보는 일이 영화에 대한 예의라고 그들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영화는 삶보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고, 갑자기 너란 인간이 몸서리치게 끔찍하게 싫어지는 그 순간에는 더 했다. 영화를 숭배하는 네가 온 세상의 이름들이 다 불리어 나온 듯한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동안 나는 저지하는 사람들을 뚫고 어두운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극장 밖의 세상도 극장 안만큼이나 어두웠다.
FAST FORWARD* 너는 그때도 몰랐을 것이며, 지금도 모를 것이다. 너의 날카로운 말들에 무관심과 태만으로 대응했던 내가 사실은 영혼을 다쳤다는 사실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 따윈 상관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내 삶은 단 한 번도 정상괘도 속에 놓여있질 못했고 비틀거렸지만, 그 우회의 삶을 즐기면서 살아왔는데, 내가 나로서 언제나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너는 나에게 타인의 눈으로 나 자신을 보는 법을 가르치려 했다.
PLAY* 그때 나는 빔 벤더스의 대표작이라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지 않았다. 날개 달린 천사가 날개를 접고 우리들 가운데 살고 사랑하는 이야기라고만 너에게 들었다. 어쩌면 네가 나한테 해준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늘 상상했다. 밀리언 달러 호텔의 첫 장면처럼 옥상을 가로질러 뛰어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회색 천사의 모습을.
STOP* 톰톰처럼 누구든 한 번은 날 수 있다. 딱 한 번. 그리고 끝이다. 모든 걸 걸지 못해서 나는 너를 잃었다. 나를 버리지 못해서 너를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이제는 없겠지만, 나는 빔 벤더스의 영화를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너는 내 옆에 없을 것이다. 내 옆에는 나만의 천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눈이 아닌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을 본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말하리라. 하지만 너는 내 말을 결코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언어의 장벽보다 무섭고 무겁고 두터운 영혼의 장벽이 있을 테니까.
EJECT* 밀리언 달러 호텔의 시절로부터 시간은 아주 잘 흘러가 주었다. 너와 내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았던 극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며 나의 무심함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이 세상 무엇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없고, 세상이 바뀌어야 할 이유도 나에게는 없다. 조용히 견디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지면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으로서도 최선이고 또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내가 대견스럽다. 비록 그 무엇에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지지도 않았으니까.
Fin.
장편소설 <백수생활백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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