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가 출근하는 이유
“엄마~~ 사랑해! 이따 맛있는 거 사 오세요~”
아침 일찍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데 둘째가 쪼르륵 달려 나오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더니 내 손에 빈 종이가방을 들려주었다. 얼떨결에 빈 가방을 받아 들고는 "응 알았어. 엄마 맛있는 거 사 갖고 일찍 올게. 근데 맨발로 나오면 어떡해! 바닥 지지야. 얼른 들어가"라고 말하며 급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해로 9년 차 워킹맘인데도 매일 아침 아이들과 헤어지는 순간은 늘 짠하고 미안하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약 1시간 거리다.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대중교통으로 여러 번 갈아타야 한다. 버스에서 지하철로 갈아탄 후 다시 환승하려고 기다리는데 아이가 건네준 종이가방에 시선이 꽂혔다. 며칠 전 아이스크림을 사면서 받아온 핑크색 종이 가방이었다. 빈 가방만 봐도 아이에겐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보다. 순간 맨발에 내복 차림으로 뛰어나오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소보루빵을 사 갈까 아님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사갈까..' 뭘 사 갖고 가면 좋을지 고민하는 동안 회사 앞에 다다랐다. 회전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업무 모드로 전환되었다.
늘 그렇듯 온종일 회의에 자료 작성을 하다 보니 퇴근시간을 훌쩍 넘겼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데 그제야 빈 종이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간식을 미리 사뒀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말았다.
'지금 어디 가서 사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집 근처로 가기로 했다.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해졌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8년 전 첫째를 낳고 잠깐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시던 때가 있었다. 그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애들은 낮에는 괜찮은데 해만 지면 불안해서 엄마를 찾아. 그러니깐 웬만하면 해지기 전에 들어와라"
집 앞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급히 편의점에 가서 과자 두 봉지를 샀다. 아침에 그렇게 고민을 했건만, 늦은 시간이라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아이가 준 종이가방에 과자를 넣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걷다가 놀이터 앞에서 발길이 멈추었다. 깜깜해진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바글바글 했겠지..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놀아줄걸..' 아이와 일상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 마음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언제까지 다녀야 하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은 이미 저녁을 먹고 숙제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엄마품이 그리운 둘째가 먼저 "엄마~!" 하고 달려오며 안겼다. 그리고는 종이가방을 슬쩍 열어보더니 "우와, 과자다~!" 하며 형에게도 보여 주었다. 둘이 나란히 식탁에 앉아 과자를 나누어 먹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아이가 나에게 빈 종이가방을 건네 준 이후로 나는 요즘 매일 간식을 사서 들어온다. 하루 종일 업무와 육아를 하느라 녹초가 된 남편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늦은 저녁 식사를 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나눠 먹는다.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문득 내 어릴 적 월급날에는 어김없이 가나 초콜릿 한 상자를 사들고 집에 오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뛸 듯이 좋아하는 모습에 힘이 나서 아버지는 또 한 달을 열심히 사셨을 거다.
아직까지 내 힘으로 아이들의 소소한 간식을 사줄 수 있는 것.
오늘도 내가 출근을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