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동욱 Oct 09. 2024

2-19. 애증(愛憎)의 마음

한자, <마음>에 대하여

처음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들을 깨우던 아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꿈쩍도 않는 모습에 점점 데시벨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늦었으니까 당장 일어나!"라는 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안고서야 아들은 짜증을 내며 눈을 뜬다. 일어나기 싫다고 엄마 등을 찰싹찰싹 때리면서. 방금까지 자는 모습이 천사처럼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는데, 이렇게 말 안 듣고 꾸물거리는 모습을 볼 때면 참 얄밉기 그지없다. 사랑스럽다가 밉고, 또 사랑스럽다가 또 밉다. 이제 점점 엄마 아빠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초딩 아들의 모습이 그렇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 어릴 적 내 안 좋은 버릇 중에 하나가 양말을 벗고는 방구석 아무 곳에나 던져두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볼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야단치시며 잔소리를 하셨다. 그 당시 난 그런 엄마의 잔소리가 정말 듣기 싫어서 나중에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갈 거라고 속으로 다짐하곤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도 그런 내가 얼마나 얄미우셨을까. 자식을 키워보니 이제야 나도 당신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듯싶다.


사랑하면서도 미운 것을 애증(愛憎)이라고 한다. 자식을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부모도 사람이기에 때때로 미움의 감정이 생겨나기도 한다. '愛'(사랑 애)는 '爫'(손톱 조)와 '夊'(천천히 걸을 쇠) 사이에 '冖'(덮을 멱)과 '心'(마음 심)이 들어있는 모습이다. 손으로 심장을 조심스럽게 덮고는 천천히 걸어가는 모양이다. 사람의 몸 부위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겠냐마는 심장은 그중에서도 절대적이다. 심장이 멈추면 죽기 때문이다. 내 생명처럼 소중한 상대를 대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憎'(미울 증)은 그 반대의 감정이다. '忄'(마음 심) 옆에 '曾'(일찍 증)이 결합한 모습인데, 曾은 원래 찜조리 도구를 그린 한자다. 찜기 사이로 뜨거운 증기가 올라오는 듯 부글부글 끓는 마음, 그것이 憎의 의미다. 말 안 듣고 속 터지게 만드는 자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그 감정, 그대로이지 않은가.


내 소중한 심장보다 더 사랑스럽다가도 부글부글 끓는 마음이 드는 게 부모 자식 관계다. 어디 부모만 그렇겠는가. 자식도 엄마 아빠가 너무 사랑스럽고 좋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미운 감정이 드는 건 매한가지다. 사랑하다가도 미워하고 또 미워하다가도 사랑하는 상태를 늘 반복하지만, 그럼에도 나와 늘 함께 하는 존재이기에 부모 자식인 것이고 가족인 것이다.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저녁밥을 차려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며, 부모가 아무리 미워도 감기에 걸리면 약국 가서 감기약 사다 주는 것이 자식의 마음이다. 늘 잔소리를 하다가도 내 자식이 힘들다 그러면 누구보다 큰 힘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부모이며,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다가도 힘들 때 부모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자식이다. 사랑하거나 밉기 때문에 부모 자식인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 지간이기에 사랑하거나 미운 마음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함께 살다 보면 사랑스러울 때도, 미울 때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내 부모라는 것, 그가 내 자식이라는 것 그 자체다. 


부모로서 이 사실은 꼭 기억해야 할 듯싶다. 애초에 미움이라는 감정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관심이라는 텃밭에서 함께 자란다. 그러니 텃밭 관리만 잘해준다면 얼마든지 미움도 사랑으로 바꿔 심을 수 있다. 반대로 사랑이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자식에게 쏟는 관심이 되도록이면 미움보다는 사랑으로 자라도록 일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아이를 키우는 건 무척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한 뼘 큰 기쁨을 얻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이왕이면 미움보다는 사랑이, 불행보다는 행복이 넘치는 관계가 훨씬 낫지 않겠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