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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니아 Feb 14. 2024

갱년기 찾아올 무렵

중년의 테피스트리

아이가 20살 성인이 되자 난 성인의 성인인 무성(性)인이 되었다. 45세에 폐경이 찾아온 거다.  내 주변에 언니들도 아직인데, 평생 성장도 더디고, 철드는 것도 미숙한 내가 처음 겪는 조숙이었다.  그해에는 세 가지 사건이 있었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게 된 일, 7년을 봉양해 온 시어머니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일, 공교롭게도  14년간 해온 일을 작가가 탈고하듯 홀가분하게 끝낸, 그날 밤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의 임종은 충격이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처음이었고, 느닷없는 이별이 느닷없는 이별이 허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내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몸에 전류 같은 게 들어왔다가 나를 휘젓고 가버렸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갑작스레 갑상선과 갱년기가 동시에 찾아왔고, 노화의 직격탄이 매일매일 새롭게 찾아온다면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이다. 언니들에게 다가올 갱년기와 곧 아플 곳을 예언해 주는 노스트라다무스 동생이 되었다. 우리 자매들에게 ‘벤자민 버튼’과도 같은 서열이 생긴 거다. 이제 막 갱년기를 시작하는 언니가 도대체 이 끔찍한 건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지만, 나도 4년째 진행 중이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애석하게도 모른다고 답 할 뿐이다. 


그냥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만 터득했을 뿐, 이 손님은 도무지 파악 불가다. 언젠가 체크아웃할 날이 있겠거니 기다릴 뿐이다, 막연히는 아니다. 이 터널의 끝에 다다를 나를 환하게 안아주기 위해 꾸준히 요가를 하고 하기 싫은 일 안 하기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그간 하기 싫은 일들을 꾸역 구역 많이도 하고 살아온 내게 주어진 휴식이라 편안히 받아들이기까지 3년이 걸렸다. 그중 가장 홀가분한 일은 마음 맞지 않는 이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갱년기 초반과 코로나 시기가 겹치며 자연스레 스트레스를 주는 모임과 인간관계가 정리되니, 모임 후 집으로 돌아와 저녁 내내 찜찜하게 맴돌던 귓속벌레 같은 말도, 가까운 이를 미워하는 양심의 가책에서도 해방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일을 그만두기 직전 내게 스트레스를 줬던 직장 선배들도 갱년기 여인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이 내게 일을 그만 둘 빌미를 마련해 준 게 고맙다. 그리고 미안함도 있다. 그들의 히스테리를 이해하기는커녕 경멸하고, 신명 나게 험담을 즐겼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미리 고한다. 

언니들이 성격이 돌변하고, 변덕을 부리거든 중2병 보다 훨씬 센,  불청객이 온 것이라고, 

그 불청객은 고통을 주는 숙주와 같아서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고. 식당에서 손 선풍기나 부채와 한 몸이 된 

언니를 보거들랑 손사래 치기보다 안쓰럽게 바라보기를, 추운 겨울 공공장소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열면, 

어느 언니가 살면서 쌓인 열(화) 에너지로 고통받고 있기에 다시 문을 닫힐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라고,

우리 엄마들도 그럴 때가 있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혹여나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고 따지신다면, 엄마의

갱년기를 수수방관했거나 엄마가 애써 숨겨온 게 아닌지 의구심을 갖고, 무심한 자식이었음에 반성의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나조차 그랬다.


왜 우리 엄마들은 쉬쉬했을까? 아줌마들이 친해지는 과정에 단골 레퍼토리에는 출산경험담이 들어간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출산과정은 드라마보다 설화에 가깝다. 들으면 들을수록 다채롭고 흥미롭다. 하지만 갱년기는

미지의 성역처럼 알려진 바가 없다. 힘든 세월을 건너온 엄마와 할머니조차 딸과 손녀의 녹록지 않은 삶에 아픔을 얹을 이야기를 아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갱년기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의 내 이야기가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몸과 마음 사용 설명서 프리뷰가 되길 바라본다. 사실 몸보다 흔들리는 건 멘털이다. 자칫 이 시기에 자식들도 어느 정도 자라서 빈 둥지 증후군에 갱년기까지 들이닥치면 심리적으로 우울증이 다반사로 올 수 있다. 산모 우울증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 날 우울의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우울퇴치제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추억이든 사람이든. 취미든, 감지 신호에 내 몸이 알아서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는 사탕처럼 말이다. 


현재 난 새로운 퇴치제를 찾고 있다. 꾸준히 요가가 퇴치제였건만, 갱년기라는 본분을 잊고, 조금 더 잘해보려는 욕심 때문에 어깨 부상을 당했다. 지금은 내가 사랑한 요가가 가까이하기엔 너무 당신이 돼버렸다. 요가 말고는 다른 취미가 없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올 겨울 갈  곳을 잃고 방황할 뻔했지만 , 신년 위시리스트와 명상 특강신청이 다시 붙잡아 주었다. 어깨 때문에 즐거운 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림 그리기, 기타 연주는 상상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지만 더 이상 무너질 어깨가 있으랴. 끊어질 인대만 남아있을 뿐, 그래서 집안일 덜하고  아낀 어깨로 무엇을 할까 궁리 중이다. 


" 인생을 산다는 건 평생 질병을 앓는 것과 같다"는 니체의 말이, 갱년기라는 깊은 터널에 발을 디딘 요즘 절실히 

와닿는다. 그래서 물밖의 평온함을 간직하기 위해 물속에서 힘겨운 발길질을 해 온 세상 어르신들이 더 존경스럽고 짠하다. 그 발길질은 고단하지만,  나를 더 단단하게 일으켜 줄 동력이 된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발길질로 아파질 때가 점점  잦아진다. 의욕처럼 몸이 따르지 않아 맥이 빠지기가 다반사, 여행 좀 가려고 하면 아프고, 여행을 다녀와도 몸살이 따라온다. 하지만 아파서 멈췄을 때 세상이 달리 보이는 보상이 따른다는 것도 많이 아파보니 알겠더라. 아프고 나면 사소한 일에도 감동과 감사가 깊어지며 행복을 발견하는 마음의 눈이 떠진다. 중년의 내 몸과 마음이 낯설고 안쓰럽지만, 나를 더 사랑해주고 싶다는 전에 없던 모드를 선사해 줬다. 이제야 어른이 되어가는 으쓱한 기분과 나날이 내  마음의  빛이 빛나는 것을 들여다보며 감탄한다면 자뻑이지만, 외모는 한없이 바래지기에 자뻑 체면을 넣어도 넣어도 부족하다. 그래서 무한생성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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