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상남 Aug 29. 2021

문철수<차선공간>을 읽고

한일 차실건축 공간의미학

차선공간 표지



나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 담배는 원래 하지 않았고 술은 친구들과 만나 노는 것을 좋아했던 20대까지는 여느 학생들과 같이 잘 마셨다. 그러나 20대 후반 아이러니하게도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 술을 끊었고 벌써 2년 반이 됐다. 대안으로 커피와 차를 마신다. 사실 커피를 더 좋아한다. 정갈한 카페에서 맑은 날 야외 테라스에 나와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이왕이면 깔끔하고 다양한 맛의 스팩트럼이 있는 핸드드립을 마신다. 매번 사 먹다가 이제는 마음에 드는 기구들을 갖추고 집에서 어설프게 유튜브와 바리스타들의 글을 따라 하며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신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종종 과한 카페인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거리며 잠을 설치는 상황이 생겼다. 예전엔 아무리 커피를 마셔도 미동도 없던 내 심장이 요즘엔 조금만 커피를 마셔도 반응이 온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주변 친구들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아 몸이 노화(?)되면서 민감성이 올라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 차에 관심을 뒀다. 어릴 적부터 조부모님, 부모님께서 식후 차를 내려주셔서 자연스럽게 접했다. 하지만 제 발로 관심을 가지고 차를 마시고, 나아가 다기나 차의 맛, 그리고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였다. 자세한 스토리는 다음 글을 참고 바란다:






<차선공간>은 "차(茶)란 왜 그리고 무슨 맛으로 먹는 것일까?"라는 지극히 쉬운 질문에서 시작했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 한반도와 중국, 일본 등 수 천년의 역사도 모자라 서양의 철학까지 거치는 하나의 종합 교양서이다. 이에 더해 저자의 건축에 관한 전문성이 두 번째 파트에서 나와 동양(특히 한국과 일본)의 전통 건축과 다도 혹은 다례의 공통적인 철학적 이상이 무엇인지 결론짓고 있다. 따라서, 음료인 차에서 시작해 역사, 철학, 건축 등 간학문적인 사유가 담긴 신간 서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차에 대해 일반인들은 대개 '개량한복', '절', '산과 자연', '수염(?)', '무언가 올드한 나무들이 즐비한 공간'등 을 떠올릴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ㅋㅋ) 실제 서양의 차문화가 기호음료의 문화로서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듯한 최근을 제외하면 꽤 오랫동안 올드한 이미지의 음료로 인식된 것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 보니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차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도 마니아 층에 국한되거나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실제 차를 마시고 연구하는 사람들에 말을 종합해보면 "한국의 차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거의 끊어질 뻔했다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들 한다. 오랫동안 차를 주제로 하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서적이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은 어쩌면 차를 좋아하지만 그저 하나의 식품 혹은 음료로서만 즐기던 사람들에게 지식의 즐거움과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듯 지적인 쾌감을 선사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인용하며 독후감을 마무리해야겠다. 복잡한 전공지식이 아닌 교양을 쌓고자 하면서 평소 차를 좋아하던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피자와 커피 등도 알고 먹으면 더 재미있듯이 차 또한 마찬가지다. 전국 서점 혹은 인터넷 서점에서 바로 구매가 가능한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차(茶)는 음료이고 음식물의 한 종류이며 달고, 쓰고, 시고, 짜다는 느낌을 혀의 자극을 통해 뇌에서 느끼게 되는 미각의 세계에 먼저 속해 있다는 것이다... 차인들도 시다, 쓰다는 미각에 관련된 표현을 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단순히 미각의 세계를 다룬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요리 방법을 논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고려 중엽의 유명한 차인이자 대문장가였던 이규보의 시에 묘사된 차에 대한 다른 표현을 살펴보면 형이상학의 철학적 주제어를 사용하였으며, 순수한 차의 '맛'에 관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차를 마심으로써 道의 세계로 진입케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한데, 단지 맛을 지닌 음료의 한 가지인 차가 어떻게 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읽는 이로 하여금 단지 건너갈 수 없는 언어도단의 깊은 골만 느끼게 하고 만다.

신기했다. 분명 음료는 일단 맛으로 먹는 건인데 말이다. 그렇게 일상에 대해 깨알같이 시로 읊던 사람들도 유독 차의 맛에 대해서는 언급을 많이 하지 않았다니. 생각해보면 차의 맛은 커피처럼 초코 향, 과일 향, 산뜻한 향, 무겁고 신 향 등 다양한 맛으로 표현하는 것은 드물었던 것 같다. 차 맛은 좋다, 별로다, 쓰다, 정도로 그 언어적 표현이 현저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허령불매란 '마음이 텅 비어 어리석지 아니함'의 뜻이다. 텅 빔이란 어리석지 않기 위한 작용이며 명덕이라는 본질이 빛나기 위해서는 비워져야 한다. 한재의 표현에 주목하면 '손수', '혼자', '고요히' 차를 마신다는 허령의 전제 수단이, 호연지기, 청신, 도심, 명덕을 깨우쳐 어리석지 않게 되는 불매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차는 음료로서의 차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깨우침을 가져오는 수단이며 그 깨우침의 전환사태는 입안에 머물러 있던 찻물이 '목 넘김'으로 인해 소멸되어 사라져 버리는 존재 전환사태에 의해 격발 되는 것이다. 즉, 목 넘김은 찻물의 존재론적 사라짐, 맛과 향과 온기와 같은 감각의 사라져 없어짐, 즉 허령으로의 사태 전개를 가리킨다... 차의 목 넘김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그토록 깊은 정신작용을 부르게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차는 옛 차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애써 표현했던 것처럼 혀로 인한 감각자극으로 펼쳐지는 미각 세계뿐 아니라 그것과 연관되어 겹쳐 펼쳐지는 또 다른 형이상학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이규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한국 주요 문인 및 승려들의 시와 글을 인용해 언어로 표현된 맛의 기원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맛에 대한 명쾌한 감각적 표현보다 오히려 행위에서 오는 철학적 의미가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소멸과 허전함에서 오는 형이상학적 고찰로 이어진다. 


차 종류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끝이 없으나, 우리나라 차인들이 특히 애호했던 것으로 진명차를 들 수 있다. 진은 변화하지 않은 채 있는 그 자체대로, 명은 곡우 이후에 딴 어린 녹차 싹의 뜻이 된다. 고로 어린싹을 따서 발효하지 아니하여 원재료의 특징이 남아있도록 한 제차 과정을 거친 차를 두고 칭하는 말이 될 것이다... 이제 현재의 관점을 가진 우리는 새로운 관점에 서서, 잘 우려낸 진명의 차 한 모금을 입에 넣었을 때 전개되는 미각과 오감의 변화를 찬찬히 그리고 분석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걸 보고 오늘 한 잔은 말차가 아닌 진명차로 정했다!


차의 정신은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에고 ego의 돌연한 사라짐을 통한 참 나의 자각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차 마심은 형상적 '나'라는 것이 전혀 영원하지 않고 곧 죽어 없어질 존재라는 사실을 찻물과 맛의 홀연한 '사라짐'을 통해 구체적으로 일깨우는 철학적 행위였다. 입속에서 느껴지는 쓴맛의 사라짐, 즉 죽음 혹은 고통은 단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더 큰 차원의 탄생인 구원이자 부활임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차 마심의 의미는 더 큰 무한차원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세상살이에 집착하여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음을 알려준다.

동양 문헌에 이어 에크하르트, 톨레, 하이데거 등 영성과 철학에서 이름을 날리는 과거와 현재의 서양 철학자들의 글귀도 고찰하며 동양과 서양의 공통적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역시 사라짐 즉 죽음에 관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를 통한 새로운 지평 즉, 부활이다.


차실 건축 공간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듯 단지 방의 내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과 외부 공간을 포함한 영역 전체를 포괄하여 상정하여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차실 공간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구체성을 띠고 말하자면, 중심에 시공간이 사라지는 궁극의 점으로서의 차실이 있으며 그 점을 중심으로 외곽에 위계적 영역이 중층적으로 펼쳐지는 공간. 공간도 시간도 사라지는 것이라면 유한한 형태일 뿐이며, 유형의 것이 점차 압축되어 작은 찻잔의 공간으로 응축된 후 목 넘김으로 말미암아 홀연히 사라짐으로써 유형의 차 공간은 무형의 것이 된다.

희한하게도 음료인 차 자체뿐만 아니라 차를 마시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도 우리는 차를 마시는 행위와 철학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게 됐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일본과 한국의 전통 차실의 건축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는 공간 자체는 겉보기에는 양립 불가능할 정도로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저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또한 공통점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차로 시작해 철학으로 마무리하는 종합 교양서. 일독을 권한다.


*도서는 내돈내산으로 마련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