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개그콘서트 최고의 코너는 '달인을 만나다'였다. 개그맨 김병만은 '달인'의 아이콘 그 자체였다.
"16년 동안 oo을 연마해오신 달인 김병만 선생을 만나보겠습니다"
달인, 즉 장인은 자타공인이다. 한 마디로 어떤 분야에 능수능란을 넘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지칭한다. 우리는 그런 장인이라는 표현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막상 정말 장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고향 근처 산청에서 한국과 일본 통틀어 다완(茶碗;찻사발)의 대가인, 도예가 민영기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과연 한 분야 최고의 경지에 오른 명장은 어떤 아우라를 뿜어낼지, 말 한마디에는 어떤 심오함이 담겨 있을까? 도자기에 대해서는 역사도, 문화도 문외한이지만.
내 고향 옆 산청은 뫼 산, 맑을 청을 쓴 말 그대로 맑은 산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시골 중에서 산청은 깨끗하고 잘 정돈된 자연풍경을 자랑한다. 굽이 진 길을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고동색 문화재 표시판에 적힌 '민영기 산청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산청요는 널찍한 공간에 이쁜 한옥과 산업화 시절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함께 있었다. 특이한 것은 개집도 한옥이었다. 멍뭉이 두 마리가 연신 경계를 하면서도 졸졸 따라다녔다.
명장 민영기 선생님은 일본에서 도자기를 공부하셨다.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당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장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수많은 인내와 고뇌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는 몇 안 되는 도자기 국비 장학생에 뽑혀 일본에 건너갔고, 그곳에서 천운과 같이 스승을 만나 배움과 작가로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만났다고 하셨다.
사진: 가운데 민 선생님과 좌우 살아 있는 일본 도자기 장인들 & 전 일본 국립박물관장
이분이 어느 정도냐면...
연합뉴스 펌
이렇게 일본 총리가 산청요에 직접 찾아와 숙식을 하며 도자기를 배울 정도다. 그에게 배우러 왔다는 사실도 대단하고, 요즘 세상에 총리가 도자기를 배우겠다고 하는 것도 대단하다.
함께 건너간 동료들은 중도에 포기하거나 약속된 3년의 기간이 됐을 때 귀국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 선생님께서는 홀로 남아 욕심을 가지고 배움에 정진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장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그의 첫 번째 용기이자 결단이었다.
민 선생님은 찻잔 중 말차다완의 대가이다. (다른 종류의 도자기들도 있었지만)
친절하게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를 통해 일본 국보인 이도다완도 보여주시고, 어떤 도자기가 좋은 것인지를 설명해주셨다. 특히 장인께서 직접 개발한 말끔한 도자기 유약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좋은 유약을 바르는 것이 온전한 도자기로 가는 길이란다.
지금이야 시국이 이러하여 일본에 대한 감정이 전반적으로 안 좋지만,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평가해볼 만한 것들이 많다. 오타쿠 기질로 폄훼되기도 하는 일본인들의 한 분야에 대한 깊이와 정성은 본받을만하다.
장인께서는 단순히 일본에서 공부하여, 일본인들에게도 일인자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뼛속까지 애국자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본인이 못 만드는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당신의 소싯적 패기와 꿈이었다. 그리고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그 꿈을 이루었고, 지속적으로 꾸어 나가는 것 같다. 얼마나 멋진가?
해외 유학 중인 내게,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공부를 가능한 오랫동안 젊은 나이에 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조언해주셨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참 좋은 환경에서 배움을 이어나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역시 도자기에는 스님이 빠지기 어렵다. 이상하게 스님들은 우리들에게 종교인보다는 무술인, 예술인 등으로 친숙하다-_-.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르겠다.
도자기는 흙과 불의 예술이다. 어떤 흙을 쓰느냐, 어떤 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도자기의 성질과 모양이 달라진다고 한다. 민영기 선생님의 도자기는 자연적으로 꽃 모양이 피는 '도도야'의 경지에 올랐다. 도도야는 작은 반점과 같이 생긴 점들이 도자기 위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으로, 5-6가지 흙을 배합한 뒤 그것을 기술적으로 불로 구웠을 때 자연적으로 생기는 희귀한 현상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동일한 작품은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장인께서는 현재 그 작품들을 몇 년 간 연구하여 성공하였고,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바로 이렇다. 가운데 5개의 하얀 점은 도자기를 구울 때 여러 다완들이 위아래로 포개져서 가마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유약이 묻지 않아 생긴 반점이다. 그 사방으로 주황빛의 작은 반점들이 바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도도야다. 장인의 독보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치 꽃봉오리가 피어오른 듯 아름답다.
무려 3천만 원 ㄷㄷㄷ 제일 비싼 것도 아닌 듯하다. 부담스러워서 손도 못 대고 왔다. ㅋㅋ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과 같은 불경기 사실 도자기 그릇도 사치다. 도자기 그릇을 쓰는 사람도 적고, 도자기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도 적은데 불경기까지 겹쳤다. 그런데 말차(가루로 된 차)를 담아 마시는 다완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장인의 삶에는 그런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고난이 많이 닥쳤었다고 한다.
"그런 거 신경 쓰면 도자기 하면 안 돼"
그의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된 듯하다. 장인은커녕 도예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예술적 포만감과 현실 속 내 배의 포만감 사이의 갈등은 예술가의 필연적인 고뇌가 아닐까?
그의 작품 전시실에는 실제 좋은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었다. 장인께서는 이미 맥이 끊긴 조선 도자기를 400년 만에 복원했으며, 과거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문화를 꽃피운 불운한 조선 도예가들의 자부심을 잇고 있었다. 역설적이다. 소위 당시 최첨단 도자기들을 일본에 전해준 것은 과거 한반도인들인데 지금은 그 도자기의 가치를 일본인들이 훨씬 더 알아보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신에 대한 이야기, 유학에 대한 이야기, 선택과 결단의 이야기, 인내의 이야기, 스승과 결부된 인생에 부여된 천운과 같은 기회의 이야기들, 도자기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 등. 민 선생님의 아들과 며느리 또한 최고의 도예가에게서 배우며 도예가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만남이었다. 즐거웠다.
문화는 향유하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다완 하나가 20억을 호가하기도 한단다. 그만큼 가치를 평가하는 분위기도, 가치를 인정하고 판매하거나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