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둠을 먹고 아가야, 얼마나 큰 기쁨을 주겠니
저녁 7시쯤 퇴근한 남편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말했다. “요새 너무 행복해, 인생 리즈 시절이야.” 말인즉슨 퇴근하고 집에 오면 귀여운 아내랑 아기가 행복한 모습으로 자기를 반겨준단다. 이모님이 해준 반찬이 많아 저녁을 뚝딱 차려주니 식사 대접받는 것도 좋고, 이래저래 가장으로서의 행복을 느낀다는 것. 뭐 짝꿍이 그렇게나 큰 기쁨을 느낀다기에 좋은 일이니 듣고 넘겼다.
그러나 곳간에서 인심 나듯 이 시기 엄마에게는 ‘침대에서 인성 난다’는 신조어를 만들어두고 싶다. 11시쯤 아기를 재워두고 “이제 6시에 깨어날 거야”라고 호언장담하며 남편은 잠에 들었다. 그에게는 긍정적이고 유쾌한 순간이겠지만 내게는 버거웠다. 결국 실패의 대가는 내가 치르게 되어 있으니, 아서라 12시에 칭얼대는 아기를 안고 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기저귀를 갈고 수유의자에 앉아 멍 때리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었다. 커리어도, 잠의 질도, 체중이나 신체 건강도 인생 최저치의 퍼포먼스를 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최대의 행복”이 나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는 것을 알까? 이래서 엄마라는 말에 희생이라는 단어가 지겹게도 따라붙는 걸까? 내가 잃어버린 여러 밤, 그건 내 삶의 일부. 그 어둠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밝혔나.
매일 꺼지지 않는 무드등을 밝혀 아기의 밥과 잠이 되었다. 그건 아기의 생명이나 다름없다. 뼈와 살을 갈아 신체의 영양분을 끌어모아 아기를 낳고선, 일상까지 갈아 넣어 그렇게 키운다.
남편의 알람이 되어 그의 일상을 보전한다. 출산 이전부터 다니던 회사를 그는 계속해서 다닐 수 있다. 내가 반납한 양질의 밤잠을 먹고 그가 새벽잠을 잔다. 그의 변함없는 삶을 위해서 나는 해와 달을 맞바꾼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 자꾸만 용을 쓰는 아기에게 “그만 좀 용쓰면 안 돼?” 혼자 말하고 혼자 울었다. 남편의 행복에 온전히 동조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내가 심리상담을 받고 온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밤잠이 부족한 탓이다.
내가 잃어버린 많은 것들. 아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내게 찾아온 어둠. 그럼에도 나의 어둠이 네게 빛이 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겠지. 상담선생님이 말했듯 아기가 커가면서 힘듦보다 기쁨이 더 많아지기를.
내 어둠을 먹고 아가야, 쑥쑥 자라서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겠니
내 어둠을 밟고 여보, 얼마나 오랜 마음이 되어 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