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살기 시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마추어리 Dec 19. 2022

[아픔과 말과 삶] 아프기만 한 생은 없어

동사 중에 '-프다'가 붙은 말은 왜 하나같이 처연한 신세를 하고 있을까

아픔과 말과 삶


언어가 정녕 살아있다면 

아프게만 살아지는 당신의 존재 이유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네


아프다 슬프다 헤프다 고프다 애달프다 서글프다 어설프다 가냘프다 구슬프다


-프다는 건 왜 죽지도 않는지

그래서 나를 그렇게 만드는지

영영 살아온 당신의 역사는 오죽한지


내 귀와 입가에서 뛰놀고

어느 때는 눈빛이나 멀리서 본 뒷모습에도 비치는 당신


그럼에도

온갖 슬픔 겨우 눈물 한 방울 되듯이

생략과 함축이라는 언어의 질서

생명에도 새길 수 있다면


그립긴 해도

오로지 아프게만 살아지는 사람은 없겠네


배앓이를 하는 밤마다

옛날 얘기 끝도 없이 반복하던

할머니 보고프다




국어국문학 복수전공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은 김애란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를 만났을 즈음이다. 언어가 시대와 사용자에 따라 변하기도,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 '쯤'은 자랑스러운 국문학도로써 인지하고 있었으나, 한 언어 자체를 화자로 삼아 문학에 언어학을 반영한 그 단편소설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건 해당 전공이 단순히 시나 소설을 창조하고 향유하기만 할 것이라는 편협했던 나의 태도를 꼬집음과 동시에 무궁무진한 언어학의 세계를 제시받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아직도 내게 그 작품은 '국어국문'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애정이 활자마다 꾹꾹 눌러 담긴, 현대문학의 정수로 기억된다. 어쩌면 문학도를 꿈꾸던 내가 졸업논문은 '언어학'으로 작성하리란 것은 그때부터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문이나 비평 등 비문학적 국어를 다루는 강의는 많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내가 흥미로워한 강의는 '음운론'이었다. '글'과 '말'의 역사가 다르다는 얘기나, 본인의 고향인 경상도 지역의 '말'의 특성에 대해 얘길 꺼내면 짝꿍의 눈이 반짝인다. 그럼, 그럴 수밖에. 이게 얼마나 재미있고 어려운(?) 학문이었는데. 하여튼 4학년 막학기에 한창 음운론에 심취해 있을 때, 소심하여 교수님께 감히 질문은 해보지도 못하고 꼭 졸업논문의 주제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내용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늘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ㅣ'와 'ㅏ'를 연속으로 발음하여 나타나는 'ㅑ'가 있고,

'ㅣ'와 'ㅐ'를 연속으로 발음하여 나타나는 'ㅒ'도 있는데,

왜 'ㅣ'와 'ㅡ'를 연속하여 발음하면 나타나는 문자(발음으로 표현하자면 ㅒ를 가로로 눕힌 ㅍ의 형태)는 없을까.


허무하게도 교수님께 질문을 하거나 졸업논문 주제를 검사받기도 전에, 나의 오랜 숙원이자 일류 언어 연구학자(그땐 그런 의문을 품은 사람이 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지금도 책장에 있는 「우리 음식의 언어」라는 책에서 해답이 나왔기 때문인데, 글쎄 그게 책의 제목도 아닌 본문도 아닌 '각주'로서 한 줄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그 문자가 없는 이유는 발음의 가성비가 좋지 않아 자연히 사장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토록 단순하고 명징한 이유였다니.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그 문자도 언어로서의 본인의 쓸모와 소임을 다 했으니 사라졌을진대, 그때의 나는 말과 글이 좋다면서도 그것들에게 생명력조차 부여하고 있지 않은 거였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은 밥을 어떻게 발음하고 먹었는지 재미난 이야기를 읽다가, 숨겨진 문자를 발견한 위대한 언어학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설렘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어딘가 후련하고, 또 무엇인가 반성했다는 후문이다. 




어제, 대학교를 졸업한 지 7년 만에 언어와 관련된 새로운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겨났다. 동사 중에 '-프다'가 붙은 말은 왜 하나같이 처연한 신세를 하고 있을까?


아프다, 슬프다, 헤프다, 고프다,  애달프다, 서글프다, 어설프다, 가냘프다, 구슬프다...


과거 경험처럼 미약한 내 지식의 한계에서 비롯된 궁금증일 거라고 생각되어 구글과 네이버 어학사전을 뒤져보았는데 내 논리를 뒷받침하는 안쓰러운 단어들만 발견되었다(정말 너무너무 궁금하니까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 중에 반박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계신다면 꼭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나마 보고싶으다를 줄인 '보고프다'를 억지로 생각하여 시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위에서 거론한 '-프다'와는 엄연히 다른 형태임은 분명하다.




앞서 음운이 그랬던 것처럼 언어의 세포와 같은 어절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쓸모를 가지고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면 '-프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참으려 해도 흘러나오는 눈물처럼 아무리 살아도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 삶의 근본적인 고통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프다'로 산다는 건 또 어떤 생일까. 수천수만 년을 남을 울리는 곳에만 영영 존재해야 한다면...



신경안정제를 받으러 신경정신과에는 5년이 넘게 꼬박꼬박 출석 중이다. 거기에 얼마 전에는 안구건조증과 콩다래끼를 고치러 출근도장 찍는 병원이 하나 더 생겼다. 그러다 며칠 전 자궁에 혹이 하나 생겨 이제는 산부인과를 주 2회씩 방문해야 한다.


몸이 아팠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게 서글펐다. 어느 밤에는 슬프기도 했다. 


그래서 '-프다'라는 말의 특성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나는 나의 생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물이 반 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는 쪽에 선 사람이었다. 몸에 좋은 생각과 예쁜 말만 써도 모자란 판에 늘 아쉬운 소리만 해대서 자꾸 이렇게 몸이 아픈가-싶었다. 그래서 요즘엔 '-프다'보다는 '그러려니'하는 태도를 새기는 연습 중이다. 이상하게 그 단어만 생각하면 굳어있던 감정과 마음이 사르르 풀어진다. 서른 해가 넘도록 아프다, 죽는다 소리만 할 줄 아는 심성으로 살았으나 이제라도 무한히 긍정으로 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프게만 살아야 하는 사람은 없기에, 그게 아니라면 너무 슬플 것 같기에.


오늘 밤엔 따끈하게 데운 핫팩을 배에 올려두고 '-프다'로 끝나는 긍정의 말을 간절하게 찾고 또 찾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15. 유기인) 제 꿈을 방치하는 자, 모두 유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