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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Sep 24. 2023

[바람을 쐬고 왔는가] 타고난 정서라는 게 있어도

항불안제에 항우울제 한 알 더 받아왔을 뿐인데

바람을 쐬고 왔는가


그대

가슴에 난 구멍 새로

오늘은 어떤

바람을 쐬고 왔는가


누구는 휘파람 부는 기온에도

자꾸만 움츠러드는

험난한 너의 정서는

어디로부터 불어오는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구멍은

지울 수 없는 공백

메울 수 없는 얼룩

영 풀어지지 않는 근육

빈 데


바람이 싣는 것은

들에 핀 향기나 공중의 습도와 같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이 바람은 왜

이다지도 뻗대는 마음을 싣고 오는가

제발, 어디서부터


가슴에 난 구멍 새로

아니 젖어서 녹아든 구멍 새로

아니 쪼여서 망가진 구멍 새로

간간히 산소를 찾아 쉬며


그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바람을 쐬고 왔는가



기질적으로 자아성찰을 많이 하고, 가끔 흥은 나지만 어딘가 우울하고 진지한 데가 있다. 우연히 공황장애와 끝도 없이 더불어 살게 되었는데, 남들처럼 금방 털어내지 못하는 것 또한 아픔을 계속해서 곱씹는 이 천성탓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사 때문에 혹은 회사 근처로 병원을 옮길 때마다 우울과 관련된 다른 약을 먹어보자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웃긴 것이 항불안제는 겁도 없이 혼자서 약을 늘려보기도 줄여보기도 하면서 항우울제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도해보자, 의사선생님 앞에서는 굳게 다짐하고도 집에 돌아오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검색에 매진했다.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편견에 억하감이 있는 사람 치고는 모순적인 행동이다. 우울증약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거다. 매일 먹는 항불안제보다 단약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건 여담인데, 현대인의 고질병 중 가장 큰 한 가지는 검색병이 아닌가 한다. 걱정이 만병의 근원이라는데, 걱정을 없애는 약을 먹기 전에 이다지도 걱정을 하다니!


최근 우울해질 일이 꽤나 많았어서 우울증이라고 확진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단순 우울감이 맞는 것 같은데, 하필이면 선생님은 대표적 명명이 항우울제일 뿐인 불안장애, 강박증 등에도 활용되는 약을 처방해주었을 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두 눈을 꼭 감고 새벽 1시에 약을 삼켰다.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낮은 용량이다. (이와중에도 결혼이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부작용에 체중증가가 있어서 먹기가 싫었다...는 것은 꿀밤 한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새롭게 시도하는 게 싫은 마음. 새로운 곳도, 새로운 일도, 안 가본 장소도 싫어 여행까지 기피하는 이 과도한 두려움을 탈피해보고 싶은데, 긴 상담 끝에 처방된 약 한 알 조차 시도해보지 못한다는 건 어폐가 있지 않은가.


새롭게 처방받은 약 한 알로 인간이 바뀔거라 기대치 않는다. 슬픔의 정서가 사라지고 가슴의 구멍이 메워지지도 않겠지. 사실은 아무 효과도 없어서 곧바로 단약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너무 효과가 좋아서 평생 먹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다만 나는 나를 위한 노력을 하고 싶었던 거다. 불확실에 대한 도전, 나를 더 사랑할 용기. 오히려 이런 결정 자체가 내게 약이 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2주는 먹어야 효과가 나타난다고 하니 자고 일어나면 여러가지 플라시보 효과 놀이를 하고 있을테지. 모쪼록 나의 결정을 응원하며. 앞으로의 나날에 더 나은 길로 가는 시행착오를 스스로 만들기를 기대하며. 내일의 내가 한결 나아지길 기도하며. 마음속이 사랑으로만 가득하기를 고대하며, 모처럼 차가워진 가을 바람을 맞으며 내 삶에도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늘 들이닥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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