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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추어리 Aug 19. 2024

[동백의 대로] 서로의 길을 보며

동백의 대로


빽빽히 들어선 여름 끝에

체증이 극심히 몰려올때


저마다의 튼튼한 겨울로 들어가

회색 줄기를 타고 천천히 흐른다


가슴에는 에어컨 바람이

잠깐 머리칼을 흐트러뜨릴때

한껏 좁아진 시야각이 

또 아지랑이 처럼 뿌얘지며

검은 겨울 빼곡한 동백밭을 눈앞에 떠다놓는다


각자의 차창 속의 각자의 미술관 속의 프레임 속

깜빡이는 동백꽃밭을

고양이눈으로 바라보는 너


딱 안전거리만큼의 거리감으로

가닿지 못하는 풍경을 보며

산채만채 목적지를 향하는 움직이는 관람차




우리 부부는 뚜벅이였다. 나는 이십대 초반에 면허를 따두고 그대로 장롱면허로 썩혔고, 남편은 어릴적에 겪은 여러 번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어 무면허였다. 과거형으로 적는 이유는 이제 둘 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내 남편을 볼 때마다 운전면허는 꼭 땄으면 좋겠다고 당부를 했다. 남편을 오래 만나긴 했지만, 어릴 적에도 '차 있는 오빠'조차 한 번 못 만나본 나로서도 남편이 운전을 할 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올 걸 알기에 미안했지만, 차후 아기가 생기거나 더 나이가 들었을 때를 고려하면 매도 미리 맞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운전연수를 받고 남편은 면허증을 받아들었다. 내 동생, 그러니까 처남에게 운전연수를 딱 한 번 받고나서 쏘카로 여러번 연습을 거듭했다. 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 작지만 사랑스러운 중고차를 하나 마련해주셨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나는 주행이 시작됐다.


자동차를 타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재미있었다. 뚜벅이 시절 서러웠던 것들을 하나둘 떠올리며 도장깨기를 해나갔다. 애매한 거리에 있어서 불편했던 마트에 차를 끌고 갔다. 그러면 무겁게 짐을 들고 택시를 잡거나 하지 않아도 된다. 박스에 물건을 담아야 하는데 테이프와 칼을 안 가져와서 남편과 싸우던 날이 생각났다. 경기도 인근의 대형카페도 갔다. 외근을 나가야 하는데 빨간 버스를 시간 맞춰 갈아타는 법을 몰라서 애를 먹었던 날이 생각났다. 말로만 듣고 한 번도 못가본 일산 이케아도 여러번 차로 지나갔다. 지금까지 서러워서 어떻게 살았는지, 남편은 그런 기쁨에 취해 이삼일에 한 번은 꼭 놀러갈 만한 곳을 정해서 보여줬다. 그러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잠에 들 때까지 티맵으로 목적지도 찍어보고 가는 길의 모양새와 신호들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움직이는 짐칸', '움직이는 충전기' 등등 남편은 자동차의 장점을 나열했다. 개인적으로는 답답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또 다른 생각이 있었나보다.


평일 혹은 주말의 늦은시간 등 도로에 차가 없을 때 주로 차를 몰고 다닌 후에는 출퇴근을 도전해봤다. 은평구 끝자락에 있는 우리집에서 남편의 회사까지 가려면 꽉막히는 통일로와 강변북로를 지나야 했다. 퇴사 후 카페를 돌아다니는 나는 남편의 첫 자차 출근차를 타보기로 했다. 반쯤은 초행길인데다가 좀처럼 차선을 바꾸기도 힘든 빽빽한 출근길에 현기증이 났다. 유턴을 못해서 별안간 한강다리를 한번 건넜다 오기도 했지만, 숨막히는 지하철이 아니라 음악이 나오는 내 공간을 이용한 출근이라니. 가끔 욕설을 몇 번 뱉긴 해도 여간 쾌적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남편이 어찌어찌 운전을 이어갈 무렵, 사실 나는 전날 밤을 꼴딱 새서 피곤한 상태였다. 같이 도로를 봐주고 사이드미러도 봐줄 요량이었는데 하품이 자꾸만 나왔다. 꼭 자지 않아도 되는데 남편은 자꾸만 한 숨 자라고 머리를 뒤로 눕혀주었다. 알고보니 내가 같이 도로를 봐주는 것보다 자신을 믿고 편하게 잠을 자는 모습이 본인에게는 더 힘이 된다고 했다. 아,가끔은 적당한 무관심이 최고의 응원이 될 수 있구나! '믿음' 이 두 글자만이 세상의 모든 남편들을 살게 하는건 아닐까, 풋 웃음이 나왔다.


 

출근길이 즐겁고 상쾌했다면 퇴근길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세상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인 것도 아닌데 이렇게 운전을 한다고? 다들 집에 얼른 가고 싶어서 이렇게나 길에 안 끼워준다고? 얼마나 차가 많이 돌아다녔으면 큰 좌회전 차로에 차선이 하나도 안 보인다고? 용산과 서울역 앞을 몇 바퀴 헤매다 드디어 아는 길에 진입하고는 한 숨을 돌렸다. 이제 직진만 하면 된다, 하고 차창 앞을 바라보는데 길이 꽈악 막혔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당기는 자동차 궁둥이마다 빨갛게 불이 들어왔다. 나는 그게 겨울처럼 차가운 회색 도시에 핀 현대식 동백꽃밭같다는 상상을 했다. 


가끔 운전을 하다 테슬라나 이름도 생소한 외제차 엠블럼을 보면 놀라웠던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아직 초보운전이고 자동차 브랜드도 잘 몰라서 도로위에서나 밖에서나 차 구경을 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사실은 연식이 좀 된 우리 차를 보고 사람들이 우스워하진 않을까(...)하는 상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에서는 우리 차창 말고도 그 앞에 있는 소나타, 그 앞에 있는 제네시스도 결국엔 같은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운전을 배워서 출퇴근에 성공하고, 그렇게 조금 안정된 생활 속에서 또다시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조금 더 좋은 차를 산다. 그 차를 사고 더 안정된 생활 속에서는?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자동차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을 편하게 해주는 수단일 뿐이니까. 그러니 중고차를 타든 롤스로이스를 타든 꽉 막힌 도로를 바라보는 모양은 아무에게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뚜벅뚜벅 잘만 걸어지는 다리를 두고 굳이굳이 앉아서 가겠다고 무거운 고철덩어리를 운전하는 인간의 창의력이 귀엽게 느껴졌다. 퇴근 풍경을 보면서 1년 뒤에는 앞 차인 소나타를 사고, 몇십년 후에는 앞앞차인 제네시스를 사고, 그런 계획을 세우는 인간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꼬리를 물고 서로가 이뤄낸 빛을 바라보는 퇴근길의 직장인들. 물론 그것이 우습고 초라한 것은 아니다. 그저 극한의 현대미술을 차창으로 관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 입구를 떡하니 막아논 경차와의 기싸움을 끝내고 주차장에 차를 대며 하루간 쌓인 피로를 느꼈다. 


이제 자동차로 출퇴근을 할 수 있게 됐다. 한 걸음 떼니 저 앞에 또 가봐야 할 거리가 수십미터 펼쳐져 있다. 아무리 막혀도 앞으로 가는 도로처럼, 이게 뭔지 맞는지 혼란스러워도 엑셀도 브레이크도 밟아보며 이때까지처럼 꾹꾹 잘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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