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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Sep 03. 2021

#15. 퇴사 후 복지

이토록 양지바른 삶이라니

밥 먹다 말고 딸이 창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


너 뭐해? 명상하는 거야?

그냥,,, 날씨가 좋아서,,, 오랜만에 햇빛이 너무 좋아서,,, 그냥 폼 잡아보는 거야.


날씨가 좋으면 기분이 좋다는 딸, 딸의 똥꼬 발랄한 모습을 뒤에서 이렇게 관전하고 있노라니, 자신의 창조물을 보고 보기에 좋았더라며 흐뭇해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고,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이렇게 사랑스러운 모습은 언제까지 보여줄 건가 싶고, 덩달아 행복하고 흐뭇하고 그렇더라. 오늘의 이 모든 기쁨은 저 멀리에서 우리를 굽어보고 계시는 해님에게 돌리고 싶다.



타이밍 참 기가 막히다. 입추가 지나자마자 햇빛이 살포시 문지방을 넘어섰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집으로 들어오고 있고, 점점 깊숙이 들어올 것이다. 한여름 같으면 커튼으로 방어막을 쳤겠지만 이제 좀 살만 하니 문을 활짝 열어둔다.


오늘 딸의 사랑스러운 햇빛 맞이 의식을 보고 있노라니 나의 달라진 복지를 새삼 실감한다. 퇴사 후 달라진 것 중에 하나가 햇빛이다. 흐려서, 비 와서 해가 안 나온 날 말고는 대체로 햇빛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이렇게 양지바른 삶과는 정반대인 어둠의 삶을 살던 때가 있었다. 북한의 '샛별 보기 운동' 저리 가라 수준으로 까만 새벽에 출근해서 까만 까만 밤에 퇴근하던 날들, 잠도 못 깨고 지하철에 실려갔다가 잠든 채 지하철에 실려오던 날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도 없어서 도시락 시켜먹고, 젓가락질할 새도 없어서 김밥 입에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키보드 두드리던 날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햇빛 찬란한 삶인지 새삼 깨닫는다. 햇빛도 못 보면서 선크림, 비비크림 잔뜩 처바르고 다녔는데 요즘은 맨얼굴로 막 쏘다니면서 비타민 D를 합성하고 있다. 대체로 소비활동이었던 회사 복지 혜택이 없어진 대신, 대체로 생산활동인 햇빛 복지가, 퇴사 후 달라진 나의 삶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빨래


해가 나면 분주해진다. 한 줌의 햇빛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는 알뜰한 마음이 나를 재촉한다. 재빨리 세탁기 돌려 빨래 널고, 몇 개 안 되는 빨간를 바구니에 담아 햇빛에 널고, 시들해진 화분도 내다 놓고, 그 사이사이 축축한 마음도 내다 널고, 내가 심어놓은 가우라 꽃 감상하면서 그러고 있다.


딸이 앉아있던 자리에 화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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