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信賴)'란 한자를 풀이하면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신뢰하면 말 그대로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드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계산을 갖고 하는 확률게임의 로직으로는 신뢰를 표현할 수 없다. 누군가를 95%의 신뢰 수준으로 믿는다고는 이야기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것은 5%의 확률로 배신을 기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의심 없이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 사람의 인간됨을 믿는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믿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의지하는 것이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어준다." 이런 사람 만나기 어렵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또 그렇게 믿어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맺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잔물결만 일어도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히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거세지면 몸을 움츠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변한다. 아침저녁으로 변한다고 해서 '조변석개(朝變夕改)'라는 고사성어도 생겨났다. 소인배들의 행태가 그렇다. 물결이 출렁거리고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변함없이 믿어주는 사람은 '군자'이고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젠틀맨'이다. 삼국지에 보면 충성스러운 신하를 군주가 믿지 못하여 내쳐버리는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귀가 엷은 군주의 마음을 흔들어 상대편의 주요 인사를 제거하는 책략을 '이간책'이라고 한다. 신뢰하던 신하에 대한 거짓 증언을 들으면 처음에는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다가 또 한 번 들으면 '혹시 그럴 수도 있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한 번 더 듣게 되면 '그런 나쁜 놈이 있나'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신뢰에 금이 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가 알았던 사람 맞아?'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어떤 이벤트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신뢰에 금이 가면 기왕에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의심이 생기게 된다. 의심의 눈을 가지고 보게 되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불신의 뿌리를 키워가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든지 '뒤통수를 한방 제대로 맞았다'든지 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를 배신(背信)당했다고 표현한다. 이런 경험을 겪게 되면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배신이 가져온 마음의 상처로 인해 용서를 못하게 되는 것이고 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원망이 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되고, 또 그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면 '내가 당한 만큼 갚아줘야지, 아니 몇 배로 갚아줘야지'하면서 복수의 칼을 갈게도 된다. 쿨하게 타인으로 돌아서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9)
믿음의 사람인 다윗마저도 배신을 당하고는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용서’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는데 이 대목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천지의 주재께 요청하고 있는 모습이다. 혹자는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이 용서를 못하느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용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용서하는 것은 먼저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베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해 국제협약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신뢰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국가나 개인이나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보다는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받게 되는 불이익이 계약을 지키는 이익보다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불이익은 상대방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계약을 잘 지키지 않는 자'로 낙인찍여 받게 될 불이익까지도 포함된다. 그렇기에 일본이 '신뢰의 문제'로 프레이밍하여 국제사회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트럼트는 시리아에서 미군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의 조야에서는 '테레와의 전쟁'에서 앞장서 싸웠던 쿠르드족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쿠르드 간에는 어떤 협정이나 조약도 없다. 다만 그동안 공동의 적을 향해 힘을 합쳐왔던 것이다. 그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나자 그 자리에는 '이해관계'만이 남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배신'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피를 흘려 같이 싸운 '혈맹'과 같은 존재에 대해 의당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또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는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자국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한미동맹'이 '혈맹'이라고 하는 것은 6.25 전쟁에서 한편이 되어 싸웠다는 것으로 말미암는 일이다. 6.25 전쟁 전까지 미군은 또 하나의 점령군이었을 뿐이다. 물론 6.25 전쟁에 참전한 것도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지금까지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핵심이익에 합하는 일이기 때문이지 '혈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의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일관계'로 돌아가 보면 거기에 어떤 '의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거나 약탈하는 존재였지 언제 '동맹'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한일관계의 특수성'이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에서 '신뢰의 문제'라는 용어가 가당하기는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일 것이다. 그들은 '돈'으로 이미 과거 문제는 해결했고 '돈' 얘기는 끝난 것이니까 구차하게 자꾸 '돈' 얘기하지 말라고 '돈' 얘기만 한다. 돈은 피해나 손해를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일반적 수단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거래에 있어서 '신뢰'는 신용을 바탕으로 한다. 즉 돈을 떼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돈만 떼먹지 않는 것에 그치지 말고 '품질'로도 뒷받침해야 한다. 품질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다시 거래하기 어렵다. 속았다고 생각하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맛집'으로 뜨는 식당들이 장사가 잘되면 그 '맛'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돈벌이에 취해서 품질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품질'을 지키는 것은 고객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고객의 뒤통수를 때리는 기업은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하기 어렵다. 품질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 회사가 신뢰를 꾸준하게 유지할 수 있다.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회사들이다. 장인들은 자신의 일에 영혼을 불어넣으며 품질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이고, 경제적 이익은 그다음이다.
개인 간이나 국가 간이나 신뢰는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의리'를 지킨다는 것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이해관계에 우선하는 그 '무엇'인 것이다. 원칙을 지켜야 의리를 지킬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사정을 먼저 고려할 때 '의리'를 잊어버리고 '실리'를 좇게 된다. 여론을 고려해서 입장을 바꾸는 것도 그런 것이다. '표'를 먼저 고려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데 따르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