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리생각 Dec 16. 2019

탐욕에 대하여

경제학은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고 가르친다.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한계수익이 한계비용과 일치할 때까지 생산을 하고 또 다른 경제주체인 가계는 한계효용이 한계비용을 초과할 때까지 소비를 한다. 이러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여 생산과 소비의 균형점을 찾아가고 그 결과로 사회적 후생이 극대화된다는 것이 고전경제학의 기본 논리다. 여기에는 윤리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각 경제 주제가 최대한 탐욕을 추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프레임은 머릿속에서나 작동할 뿐이고 탐욕에 내어주게 되면 약육강식의 정글 게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탐욕은 전염성이 있다고 한다.  탐욕의 전염성은 증권시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증권투자자가 유달리 탐욕스러워서라기 보다는 증권시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 탐욕을 충동하고 있고 또 그러한 탐욕의 양태를 농밀하게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투기적 수요는 그러한 탐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한 탐욕들이 시장의 수급을 주도할 때 시장 가격은 균형 가격을 한참 벗어나게 되고 거품을 만들어 낸다. 이는 주택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격에 거래가 이뤄지고 호가는 또다시 오르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거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거품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예측할 수 없어 거품은 꺼져봐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탐욕이 지배하는 시장 상황에서는 균형 가격이라는 것이 성립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느 정도 거품이 있어야 잘 돌아간다고도 한다. 거품이 꺼지면 탐욕은 공포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공포 또한 전염성이 강하며 공포가 시장을 지배할 때 투매가 일어나며 가격기구는 또 다른 시장 실패를 만들어낸다. 가격 붕락이 가져오는 시장실패를 방어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시장에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넣는 '양적완화' 정책이다. 돈을 풀면 인플레가 자극된다는 것이 고전적인 생각이지만 지금은 돈을 풀어대도 자산 가격만 오르고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 돈이 풀려도 경제 전체로 돌지 않고 특정 부문에서만 맴돌기 때문이다. 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금리인하, 양적완화 정책은 경제를 부양하지 못하고 자산 가격만 부양하고 있는 사정이다. 그러나 보니 경제는 어렵다는데 부동산 등 자산 가격만 치솟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정부의 인위적인 시장개입에 반대하는 시장주의자들도 양적완화에는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내심 반기는 눈치다. 이윤추구 동기를 자극하는 개입에 대해서는 조용히 환영하고 그렇지 않은 개입에는 목소리를 높여 반대하는 것이 그네들이다.


자유시장경제를 회복하자고 이야기한다. 좌파정부의 시장개입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부의 공정시장 정책과 노동정책이  타깃이 되고 있다. '타다' 혁신(?) 소비자 효용에 소구 하지만 방법론은 편법과 불법과 탈법  어딘가에 있다. 그것이 합법이 되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우버의 혁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타다' 본질적으로 편법 내지 불법 위에 서있는 택시 영업일뿐이다. 거기에는 서비스 차별화만 있을 뿐이다.  차별화를 통해 기존 택시의 불편을 일부 제거하고 있는 것을 '혁신'이라고 포장한다. 소비자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반기고 있을 뿐이다. 면허를 '시장'에서 사서 택시영업을 하라는 얘기에 대해 혁신을 저해한다고 비난한다. 다른 시장 참여자들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경쟁(?)하겠다는 발상이다. 기업가의 이윤추구 동기와 탐욕은  경계가 없다. 하나를 갖게 되면 둘을 갖고 싶어 하고 결국에는 모두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본질이다. 적정이윤이라는 말은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할  포장용으로 사용하는 레토릭에 불과할 뿐이다. 기업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초과이윤이고 독점이윤이다.


탐욕은 스스로 제어되거나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제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와 사망에 이르도록 커져만 가는 것이 욕심이고 탐욕이다. 정책이나 제도로 탐욕을 제어하는 방법이 있으나 탐욕은 제도나 정책에도 개입한다. 탐욕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게임의 룰을 바꾸려고 한다. Watch dog이 필요한 이유다. 개는 짖어대야 한다. 그러나 Watch dog들이 스스로 권력화 되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짖어대면, 사회는 혼돈이다. 언론이 그렇고 검찰이 그러니 나라가 개판이다. 새해에는 이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이상 나라 걱정으로 잠이 안 온다는 수상한(?) 사람들도 보고 싶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정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