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에서의 생활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과 상처를 입혔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아동학대에 가까웠고, 기껏해야 10살이 채 안됐던 우리가 버티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우리는 항상 눈치를 보고 살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몸을 담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스무밤만 자면 온다는 엄마는 1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다. 엄마는 여행비자가 끝났지만 불법으로 체류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눈만 감으면 아른거리는 당신의 자식들이 생각나 온갖 험한 꼴을 봐도, 갖은 멸시를 당해도 꿋꿋하게 버텨냈다. 그렇게 해야 우리에게 생활비를 보낼 수 있었고, 당신의 새끼들을 하루빨리 되찾을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의 상황을 알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형, 누나와는 달리 난 엄마의 상황을 그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난 일본에는 돈다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줄로만 알았고, 형의 말대로 스무밤만 지나면 엄마가 돈다발을 들고 돌아와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스무밤이 지났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고, 난 매일 엄마가 보고 싶다며 형과 누나에게 울며불며 떼를 썼다. 내가 그러면 누나는 같이 울었고, 형 또한 우리를 다독이다 같이 우는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나는 엄마가 나오는 꿈을 꾸는 일이 잦았다. 처음 1~2년간은 엄마와 같이 사는 꿈을 많이 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엄마의 얼굴이 잊혀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막상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거나, 내가 엄마를 쳐다보면 엄마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흐릿하게 사라지는 등 잔인하고 슬픈 꿈밖에 꾸지 않았다. 그런 꿈을 꾸는 날에는 새벽처럼 일어나 소리죽여 울며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큰집의 사람들은 그런 나를 마땅찮게 생각했고, 몇 번 혼난 이후로는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게 되었다.
얹혀살았던 집의큰아버지는 무자비한 독재자였으며, 폭군이었다. 우리가 그의 눈 밖에 날 때면 그는 우리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며 우리를 맡는 게 아니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주 큰엄마를 때렸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숨죽여 우는 게 최선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큰엄마는 울면서 우리를 안고 미안하다며 사과하다가도 갑자기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러다 싸움의 정도가 심해지는 날이면, 우리는 옷가지가 담긴 박스 하나를 들고 쫓겨나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큰아버지가 잠에 들면 큰엄마는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뒤졌고, 놀이터에서 서로 껴안고 벌벌 떨며 우는 우리를 데려와 대충 밥을 먹이고 재웠다. 그것은 몇 개월마다 있는 일상이었고, 우리는 익숙해져만 갔다.
몇 해가 지나고, 우리가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자 그들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밭에 가서 일을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잡초를 베고, 고구마를 캐고, 돌을 줍고, 가축들을 돌봤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큰엄마의 건강원을 지키거나 집안일을 도왔고, 그 일조차 하지 않을 때면 고사리같은 자그마한 손으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큰아버지의 발을 안마했다.
당시의 우리는 또래 친구들처럼 일이 아닌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었다. 안방에 컴퓨터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방에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예전에 쓰던 고물 컴퓨터가 고장 난 일이 있었는데, 내가 고장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범인이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살림살이를 좀먹는 해충’이었다. 만약 우리 중 한 명이 몰래 컴퓨터를 하다 걸리면, 그 날은 엎드려뻗쳐를 한 채 죽도나 목검으로 죽도록 맞는 것이었다.
형은 이런 비참한 삶을 꿋꿋하게 버텼다. 죽도록 힘들어도 숨어서 울었으면 울었지 우리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장남의 위치에서, 성도 다른 이 미친 사람들과 동급이 되지 않으려 동생들을 이끌었다. 무뚝뚝한 성격 탓에 아직까지도 형의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미치도록 외롭고 힘든 혼자만의 싸움이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나와 누나는 그러기엔 나이도 생각도 너무 어렸다. 연년생인 우리는 1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동반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우리는 덩치보다 훨씬 큰 짐을 진 개미처럼, 나이에 맞지 않는 커다란 짐을 이고 살았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 큰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는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이 우리가 바르고 성실하게 자라도록 키우는 것이라 믿었다. 아니, 사실 그런 것은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일꾼이 필요해서, 혹은 이 짐 덩어리들이 놀고먹는 게 눈꼴이 사나워 그런 것 일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어린 일꾼이었고, 시종이었으며, 편리한 감정의 쓰레기통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반항하려는 생각이 들기 전 체념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맞기 전에 도망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고통으로 위협하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부모의 사랑은 TV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떠올렸다. 그렇게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03년의 어느 날, 우리는 어느새 작은 괴물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