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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Nov 06. 2022

비로소 소돌해변에 안착했습니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건 잘 없지만 안 되는 것도 드물다

여행 계획을 짤 때 제일 중요한 건 날짜를 정하는 일이다. 달력을 살피며 여러 가지 조건과 일정을 조정해 가장 무난한 날을 선택한다. 선택된 날은 내겐 가장 최선이다.


선택된 날을 향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그런 하루들이 쌓이면서 길거리 돌부리처럼 하나 둘 불쑥불쑥 변수들이 등장한다. 스스로 헤치며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이야 언제든 있기 마련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변수들이 걸림돌이 될까 노심초사한다.


직업이 소방관이다 보니 예기치 않은 돌발 변수들이 주변에 보이지 않게 상존하고 있다. 산악, 수난사고처럼 현장활동이 장기간 소요되는 뜻하지 않은 일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일정이 있다고 혼자만 빠져나오기 곤란하다. 월간 일정에 미리 공지를 해두긴 하지만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빈번하다.

이상하게도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생각면 꼭 그날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머피의 법칙이 등장한다. 내 머릿속의 불운한 기운을 우주는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이번 소돌해변 여행도 마찬가지다. 특별 숙박 포인트에 당첨되어 한 달 전에 미리 예약을 잡았다. 평소 지나다니며 언젠가 그곳에 꼭 가보리라 생각했던 그 바닷가 숙소였다.

모든 변수를 다 피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주문을 외웠건만 머피의 방문에는 변수가 없었다. 이번엔 외부 감사였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변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한가? 회피로를 만들기 위해 침착하게 생각하고 작은 순발력을 발휘해 보고 안되면 재빨리 포기해야 한다.   

이번엔 조삼모사 같은 꾀를 냈다. 월요일의 하루를 절반으로 쪼개 반일 연가로 돌려서 오후엔 출근을 하는 조건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는 가을 풍경은 매년 보는데도 매년 경이롭고 신비롭게 아름답다. 가을 단풍은 첫사랑의 추억 같다. 때론 한 그루의 나무가 감동을 주고, 때론 산과 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지금까지 맞았던 모든 가을이 위대했고, 오늘의 가을 또한 아름답고 위대해서 설렌다. 짧고 아쉬워서 더 그렇다.


대관령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넘기고 비로소 주문진 소돌해변에 안착했다. 해변이 짧고 완만한 데다 빨간 등대 하나와 제주바다처럼 맑고 투명한 바다를 가진 작은 어촌의 풍경은 봐도 봐도 경이롭고 신비롭긴 가을 단풍이나 매 한 가지다. 소돌마을의 풍경들이 여기까지 오는데 걸렸던 크고 작은 변수들로 인한 조바심을 망각의 주머니 속으로 넣어버렸는지 까맣게  잊었다. 이게 힐링인가.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아들바위 앞을 지나 등대까지 산책을 했다. 유명 관광지를 비켜 있어 그런지 한가해서 더 좋다. 일요일 오후가 한가롭고 한가롭다. 방파제 낚시꾼들도 급할 게 없다는 듯 낚싯대를 놓고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있다.

사진 찍기 좋은 등대에 우리 밖에 없어 텅 비었으니 이상하게 사진 찍고 싶은 맘도 없다.


방에 들어가니 창문 가득 바다 풍경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문을 열면 파도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텔레비전을 보다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졸려 잠깐 낮잠도 잤다. 저녁을 먹으러 주문진에 다녀왔더니 날이 깜깜해졌다. 어둠에서도 위장크림 바른 병사의 웃음 속에 보이는 하얀 이처럼 부서지는 파도가 간간이 보였고,  등댓불도 규칙적으로 반짝였다.

'20세기 소녀'영화와 주말 드라마를 봤다. 낮잠도 잤는데 너무 졸려 드라마 중간에 졸기도 했다. 파도소리를 들을 새도 없이 잠들었다.



안대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빛을 감지하고 놀란 토끼처럼 재빨리 시계를 봤고, 해 뜰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고개 들어 창 밖을 보니 어선들이 큰 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어부들의 부지런함에 경의라도 표해야 하나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불속 온기에 안주하는 것이 내겐 더 필요했다.

구름에 가려 장엄한 일출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가 단풍처럼 붉게 물드는 경이로운 아침을 이불속에서 맞는 호사를 누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삶터에서 일상적인 시간을 보낸다. 여행이란 이런 범위를 벗어나는 변칙적은 행위다. 마치 부딪치기 위해 달려오는 장애물을 비켜가며 레이스를 완주하는 자동차 게임처럼. 평범했던 일상에 느닷없이 다가오는 변수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소돌해변으로 간 내 여행처럼.


세상에 평범한 여행은 없고, 덤덤하거나 기쁘지 않은 여행은 없다. 머피가 방문할까 알게 모르게 조바심하다 마침내 떠나고 도착한 모든 이들의 여행은 삶의 특별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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