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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Nov 18. 2023

그 섬에 오르다. 제주

1.

  친구들과 제주 여행 떠나는 날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내로부터 톡이 왔다.

  

  지금부터 제천은 잊고

  큰일 아니면 연락도 말고

  장남, 남편, 아빠, 팀장이 아닌

  그냥 김영래로만 시간을 보내봐요~

  진짜 여행을 해봐요~ 

  본인한테만 집중하고


  진심이 닿아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만 떠나와서 미안했고, 또 한편 혼자라서 허전했는데 이런 말을 해주는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장 화장실 갈 때 짐 봐줄 사람 없으니 다 끌고 다녀야 하고, 까다로운 탑승 절차도 상의 없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에 걱정이 앞서는데.   

  그 짧은 몇 마디가 뭐라고 고맙고, 안심되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려는 시도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주에 내렸다는 소식만 주고 아내 말대로 톡을 끊었다. 마중 온 한 친구는 측량일을 하면서 전국을 다 훑고 다니는 최고의 드라이버이자 지리 지식이 풍부한 가이드이며, 다른 한 친구는 대학 동기로 1학년때 조국순례대행진의 힘든 고행을 함께 했던 끈끈한 우정으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중국 사업을 정리하고 백수로 살고 있지만 소탈하고 배려심이 깊다. 이런 친구들과의 여행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며칠간의  시간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슴 가득 고였다.   

  1번 게이트로 나오라더니 번개처럼 나타나 날 픽업하고, 배고플까 간식까지 챙겨 와 준 그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사람이 느끼는 감동이나 기쁨은 큰 것이 아닌 작은 배려에 있다. 

 

  2.

  8년 만에 찾은 제주는 새로웠다. 깔끔하게 단장한 도로와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야자수와 가로수.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가을 단풍보다 더 아름다운 주홍빛 귤밭까지. 풍경은 이국적인데 농협이 있고, 한국말 간판이 있고, 어디를 가나 우리말을 쓰는 곳. 한 시간이면 외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여행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고, 여권 주머니를 수시로 살피며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너무 안심되는 제주가 우리 땅이어서 좋다.  

  한라산 중턱을 가로질러 외돌개 바위가 있는 올레길 7코스에 도착했다. 뉘엿뉘엿 해 지는 길을 걸으며 사진 찍고, 철 모르고 핀 붉은 동백꽃을 보며 '모란동백' 노래를 떠올려 음악을 들으며 잠시 우수에 잠겼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첫 여정을 보내고 공항 인근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흑돼지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생막걸리에 고소한 구이 한 점과 여행의 들뜬 기분에 쏟아내는 객쩍은 소리까지 즐거운 시간이었다. 

  3. 

  이튿날 영실로 한라산을 올랐다. 장 트러블타인 내가 산행을 주저할 때 기다려 주고 배려해 준 덕분에 용기를 내 함께 할 수 있었다. 토요일 오전. 뒤따라오고 나가는 차가 없어 너무 한가하다 했는데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들이 빼곡했다. 부지런쟁이들은 벌써 다 올라간 후였다. 날씨는 맑고, 하늘은 더없이 청명했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상을 보며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니, 쪽빛 바다와 쪽빛 하늘이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무변광대한 제주바다가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었다.      

  구상나무와 조리대 등 특이한 한라산 식생과 드넓게 펼쳐진 대평원 끝에 우뚝한 윗세오름의 위풍당당하고 멋진 모습에 수백 번 감탄을 토했다. 남벽 분기점까지 한라산의 각각 다른 겉모습을 270도 정도를 돌며 둘러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위치와 빛 때문에 매번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는 윗세오름의 위용을 이곳에 다 적을 수 없는 나의 한계가 안타까웠다. 그때의 생각을 곱씹으며 영실탐방기를 따로 적어 볼 생각이다. 

  고행을 견디고 나를 데려다준 몸에 감사한 마음으로 맛난 생선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월요일엔 오늘 보지 못한 한라산을 마저 보기 위해 성판악으로 오를 계획이다.   


4.

  셋째 날, 여행 목적지는 비양도였다. 섬에서 다시 섬에 오르기 위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여행하며 겪는 갈등 중의 하나가 시간과의 싸움인데 여유롭게 즐길 것인가. 촘촘한 일정으로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더 많은 곳을 다닐 것인가의 문제다. 물론 나는 전자의 유형이지만 섬이라는 독립된 지형의 특성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이 제약되는 경우라 어쩔 수 없었다.  

  비양도에 닿으면 여행객들 누구나 그렇게 하듯 아침식사로 보말죽을 먹었다. 그리고 세찬 바람길을 뚫고 걸어서 섬 한 바퀴를 돌았다. 9시 배로 들어가서 12시 배로 다시 나오려니 시간이 남아 다시 산 정상에 있는 등대까지 올라갔다. 

  코끼리 바위와 펄랑못, 혼이토(애기 업은 돌) 같은 관광지가 있지만 유명세만큼 기대감을 충족할 볼거리나 감동은 없었다. 봄날이나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 촬영지로도 알려졌지만, 찐 펜이 아니고서야 카메라 렌즈로 본 영상과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실망하기 쉽다. 그곳은 그냥 현실의 삶일 뿐이다. 

  세찬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리는 배를 탔다는 새로운 경험과 한림을 지날 때면 그 섬에 다녀왔다는 정도의 사실에만 만족하고 싶었다. 

  문어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해안가를 돌며 푸른 잎새 사이로 주홍빛 물감을 찍은 듯 주렁주렁 열매를 맺은 귤나무밭이 나타나는 골목길로만 주로 다녔다. 제주 가을의 제일 풍경은 귤밭이다. 그 풍경을 보는 이들은 누구나 풍요의 벅찬 기쁨을 맛보게 된다. 괜히 부자가 된 듯 넉넉해지는 기분. 나만 그런가. 

  저녁은 방어회와 매운탕이었다. 제주의 맛을 골고루 먹어 볼 참이다.

 5.

  월요일 한라산행의 기대와 두려움으로 일찍 잠들었다. 새벽에 카톡문자 알람이 울렸다. 기상악화로 한라산 탐방이 진달래 대피소까지만 가능하단다. 잠은 깼고, 거기까지라도 갈까 말까 고민하며 이불속에서 뭉그적대다 아침을 맞았는데 다시 한번 톡이 울렸다. 전면 통제였다. 

  우리가 잠든 사이 한라산엔 첫눈이 내렸고,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모든 '첫'자가 들어가는 단어엔 설렘과 어설픔과 아쉬움이 숨어있다. 펑펑 내리는 첫눈을 본 적이 없고, 첫사랑이 순조롭게 성공한 예가 드물다. 내게 한라산 등반이 첫 시도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쉬움을 달래려고 성판악에 올라 눈 구경을 하고 서귀포로 넘어가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해안가 마을길로 제주를 반 바퀴 돌아 숙소로 돌아 올 참이었다. 광치기해변과 성산일출봉을 거쳐 종달리 마을에 들렀다. 해변엔 이제 막 겨울 왔다는 걸 알리는 찬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잠깐만 창문을 열어도 햇볕에 잘 마른빨래에서 나는 신선한 물내같은 바람내가 훅훅 베어났다. 

  종달리 마을은 이름도 풍경도 아름다웠다. 특히 '종달'이라는 이름을 입에서 되뇌면 쉴 새 없이 재잘되는 종달새의 수다가 들릴 것만 같아 사람들의 기억에 더 오래 남는 듯싶다. 경주 황리단길이나 부여 자온길처럼 오래된 시골 마을에 젊은이들이 둥지를 틀고 가꾸어 아기자기한 레트로 감성이 느껴졌다. 월요일이라 문 닫은 곳이 많았지만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걸어서 한 바퀴 도는 좁은 골목길은 내 고향처럼 정겨웠다.

  김녕에서 해수사우나로 여독을 풀고, 함덕해변에서 멋진 노을 풍경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만큼 큰 그릇에 수북이 담긴 해물탕으로 맛난 저녁을 먹었다. 

6. 

  여행 마지막 날인 다섯째 날 친구는 한라산 등반의 아쉬움을 놓지 못하고 기어코 등반을 해야겠다며 어두컴컴한 새벽에 나갔고, 혼행에 익숙하지 못한 나였지만 뭐든 하고 싶어 브런치 카페를 찾아갔다. 혹시 기회가 있으면 끄적거려 볼 생각으로 챙겨 온 스케치 도구를 꺼내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른 아침 대형카페 3층엔 다행히 아무도 없어 초보 그림 실력을 누가 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작은 노트에 몽당연필로 끄적거리는데 그렇게 집중했던 적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몰입했다. 커피가 싸늘하게 식을 만큼 2시간이 순삭 했다. 혼자라서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간섭하지도 간섭받지도 않고, 눈치 볼 일도 없었다. 오로지 나만 있었고, 내 시간만 있었다. 혼행이 이렇게 좋을 때도 있구나.

  설경의 한라산을 다녀온 이야기를 들으며 동문시장에서 먹은 순대국밥은 우리 동네 맛과는 달랐다. 공항에서 남는 시간을 활용해 여정을 갈무리할라 했더니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그나마 그때그때의 기분과 느낌을 추억하기에는 사진이 손쉬윘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여행엔 사진밖에 남는 게 없다는 말을 또 한 번 실감했다. 


  무사히 청주공항에 도착했다. 기차역까지 아무도 없는 어두운 길을 혼자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며 걸었고, 비행기보다 편하고 안락한 기차는 주변이 온통 비어 있어 아내가 일러 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냈는지'를 돌아보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였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만 위한다는 마음으로 살기에는 아직 내가 질 책임과 의무를 벗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직장 생활과 가족들을 위한 내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지극히 도덕적인 다짐에 이르렀다. 이는 아직 내가 너무 많이 늙지 않은 까닭이며, 아직 충분히 젊은 까닭이다.


  기차에서 내려 대합실을 나가는데 저 멀리서 병아리 걸음으로 귀엽게 달려오는 마중 나온 노랑이(우리 애마 모닝)가 너무 반가워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번 여행도 해피엔딩이었다.



* 여행일정 : 11월 10 ~ 11월 14 (4박 5일)

   첫날 : 13:40분 제주도착 -> 올레 7길(외돌개) -> 숙소 -> 지지지 흑돼지 식당, 흑돼지 구이

   둘째 날 : 7시 영실 출발 -> 하산 후 -> e 금돈지 식당, 은갈치 조림 

   셋째 날 : 비양도, 서귀포 패층 화석산지, 새섬공원 -> 모살물 식당, 대방어 등 회

   넷째 날 : 성판악 설경 -> 서귀포 판타지아 햄버거 중식, 광치기해변, 성산일출봉, 종달리 마을, 

                김녕 해수사우나, 함덕 노을해변 -> 삼성혈 해물탕 식당, 해물탕, 고등어구이 

   다섯째 날 : 나모나모 브런치카페 -> 비자림로 -> 동문시장 -> 청추공항 -> 충북선 열차 ->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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