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벽우 김영래 Oct 03. 2024

자고 났더니 가을이 왔네!

높고 푸른 창공과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한 낮을 걷다

  점심 먹고 햇살이 한가득 쏟아지는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 엊그제만 해도 염불지옥 같던 마당이 따사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맑고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는 허공에 부는 바람이 선선한 탓도 있었지만 유난히 길었던 여름을 보내는 하늘이 저 멀리 창창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은 족히 넘게 온몸을 싸고돌던 지긋지긋한 습기. 씻어도 씻어도 마르지 않는 찝찝한 때문에 에어컨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축축함을 말릴 방도가 없어 에어컨 숨결아래 숨어 지냈던 날들.   

  나이를 먹으면서 추운 겨울보다는 그래도 여름을 견디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지속되는 더위에 헛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하루 만에 반전이 이뤄졌다. 더워도 너무 더웠던 세 달 넘는 여름이 하룻밤새에 가 버렸다. 자기 전까지만 해도 후텁지근했는데 아침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기분 좋게 추웠다. 속이 후련했다. 이제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겠는걸.


  걱정도 팔자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참 좋은 계절, 그 가을이 없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갑자기 추워지면 악몽같이 지긋지긋했던 여름이 그리워지는 건 아니겠지. 추우면 좀 뛰고, 걷고, 높은 산에 오르며 땀 내고, 체육관을 찾아가 탁구 치지 뭐.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따스한 햇살비를 맞고, 망중한 산보를 하며, 여름의 기억에 대한 망각의 기원으로 나를 위로해 본다. 


  스케줄표에 메모된 일정이 눈앞에 다가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한 달 전에 예약된 탁구시합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줄줄이 표시된 또 다른 메모들. 벌초와 장모님 생신, 엄마 생신, 친구들 모임, 아버지 기일과 줄줄이 기다리는 탁구시합 일정 등등. 그래서 한 달과 일 년의 시간 흐름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기다렸던 미래가 과거의 기억으로 쌓인 시간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퇴직 1년을 남겨두고 있다. 나는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 심지어 하루빨리 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백수를 꿈꾸고 있다. 그렇다고 가정과 직장에서 갑자기 책임감이 없어진 사람이 된 건 아니지만, 제복을 입고 조직 생활을 하다 보니 시시각각 카톡에 올라오는 재난정보와 언제 울릴지 모르는 대응단계 발령과 돌발상황에 대응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조바심과 불안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분출을 예고하는 화산처럼 갑자기 활발해졌을 뿐이다.  

  짧아진 가을을 더 길게 느끼기 위해서 일상에 새로운 일들을 더해야겠다. 한글날엔 서울 성수동 브런치스토리 팝업 전시 둘러보기. 둘째, 셋째 토요일엔 탁구시합 출전, 병원 방문, 일요일 당직. 벌써 10월이 다 갔네. 

  예약된 미래가 머릿속에선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네. 


 저 멀리 태풍이 밀어 올린 하늘엔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며칠 지나면 높고 투명하게 푸른 코발트 하늘을 더 볼 수 있겠지. 더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둬야지. 여름의 기억이 씻겨나갈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제비가 물어오는 것, 행운 혹은 믿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