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저절로 풍경이 보이는, 소수서원- 부석사 길

오늘 만난 풍경은 길이 준 선물이었다.

by 벽우 김영래

김훈은 <연필로 쓰다>에서 '길이라는 단어를 길다고 해서 길이 된 모양인데, 길은 공간 속으로 길고, 시간 속으로 길다'라고 했다. 길이라는 단어를 입에 넣고 껌 씹 듯 자꾸 되뇌어 보면 정말 긴 느낌이 온다.

국도는 갈래길이 많아 자칫하면 목적지와 다른 길로 빠질 염려가 있다. 물론 내비게이션을 켜 놓고 달리지만 11시 방향, 1시 방향 등등이 실제 길에서는 애매한 위치에 놓여 있어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일쑤다. 또 신호와 회전 교차로가 있어 시간 지체와 사고예방을 위해 주변을 살피며 가야 하기 때문에 신경도 더 많이 쓰인다. 여정에 우연이 끼어들 여지도 많다. 국도 여행 중 제일 바쁜 이는 내비 안내양이다. 우회전 후 좌회전, 회전 로터리에서 두 번째 출구, 아홉 시 방향 출구 등등. 쉴 틈이 없다. 반면 고속도로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명확하면 우연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원하는 IC에서 내리면 된다. 물론 계속해서 고속도로만 달려 원하는 곳에 닿을 수는 없지만.


정형화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싶다면 국도를 달려야 한다. 국도를 달리다 죽령을 넘을 때 잠깐 고속도로를 탔고, 다시 풍기에서 내렸다. 부석사를 가본 듯, 안 가본 듯 기억이 애매했다. 암튼 목적지는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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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는 차창 밖으로 소나무 가지가 멋드러지게 느러진 고풍스러운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틀어 마당 안쪽으로 들어가니 순흥면 주민자치센터였다. 현대식 건물에 뒤편에 위치한 시크릿 가든이었다. 500년 된 느티나무와 430년 된 왕버드나무 그리고 그 앞으로 이 고을을 다스리며 다녀간 이들의 공덕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소나무와 연못 뒤로 낡은 정자가 침착하고 고요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한 바퀴를 걷는 데 한 10여분 남짓 걸렸다. 한편에서는 정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정자는 보수작업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투명한 볕이 늦가을을 배웅하는 포근한 경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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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나올 때까지 딱 한 사람만을 만났다. 점심 식사를 마친 산불감시요원이 운동삼아 연못 주변을 돌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산보를 하고 있으니 여행객의 눈에는 그가 내심 부러웠다.


가는 길에 또 만났다. 근사한 소나무 정원을 가진 소수서원을. 여름엔 안동 도산서원에 갔던 적이 있어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과 냇물을 가로질러 놓인 피아노 건반 같은 징검다리와 청량감을 더하는 물소리 그리고 취한대를 돌아 박물관으로 가는 산책길은 따뜻한 가을 햇살이 더해 일품이었다. 박물관은 보는 둥 마는 둥 휘돌아 나왔다. 전통 가옥들로 꾸며진 선비마을은 드라마 세트장 같아 입구에서 돌아 나와 다리를 건너 다시 소나무 산책길을 걸었다. 서원 담장 밖에 있는 연못가 의자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며 사진도 찍고 풍경도 감상하며 한참을 있었다. 정지된 장면처럼 고요함 속에 가끔씩 새소리만 들렸다. 서원 안쪽보다 정겨운 담장 밖을 걷는 길이 더 좋았다. 가을 풍경이 이렇게 좋은데 소나무에 흰머리를 얹은 눈 쌓인 겨울 경치는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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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안내소를 지나는데 엽서가 눈에 띄었다. 1년 후에 배달되는 느린 편지였다. 두장을 들고 차에 와서 일필휘지로 무장정 쓴 후 교정도 없이 편지통에 넣었다. 델리트(delete) 키가 없는 아날로그의 정서가 새삼스러웠다. 아마 내년 11월 마지막 어느 날 나와 아내에게 엽서가 배달될 것이다. 순식간에 생각나는 대로 막 썼는데 느리게 걸으며 가을을 만끽한 행복한 감정을 썼던 것 같다. 내년에 내가 나에게 보낸 글을 받아보는 기쁨이 벌써 기다려진다.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엽서를 쓰면 매년 한 통씩 받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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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곳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런데 왜 왔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가까운 곳이고 귀에 익숙해서 그랬거나, 책이나 영상으로 보았던 기억이 강해서 마치 내가 와 봤던 곳으로 착각했나 보다.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 은행나무는 벌써 잎이 다 져 앙상한 나목으로 도열해 방문객들을 맞고 있었다. 저 멀리 그리고 높이 일주문이 보여 꽤나 가파른 듯 보였지만 거리는 멀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범종루 마루 아래를 지나 안양문 앞에 서니 꽤나 높고 우람하게 보였다. 단청이 안된 옛 건물이어서 그런지 더 정감이 갔다. 순박하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할 근엄한 표정의 근육맨이 딱 버티고 선 느낌이랄까. 한 숨 돌릴 겸 물 한 잔을 마시고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아스라이 겹쳐진 산 능선 위로 낮에 마지막 가을을 배웅하던 그 햇살이 단풍처럼 물들어가고 있었다. 멋진 풍경이었다. 안양문을 지나 무량수전 앞에 서니 사람들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보지 않고 다 서쪽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범종루와 안양문의 지붕 끝에 걸린 노을 풍경을 사진으로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과연 명품 노을이었다. 최고의 자연 풍경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기막힌 구도였다. 얼마 전 새로 구입한 핸드폰 기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옆에서 사진을 찍는 다른 사진작가들을 보면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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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난 풍경들은 모두 길이 선물해 준 것이다. 우연한 일상에 우연히 끼어들어 만난 순흥면의 풍경도 소수서원의 소나무와 냇물과 오래된 은행나무와 느린 엽서도. 그렇게 시나리오를 짜기도 쉽지 않을 만큼 우연하게 완벽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부석사의 노을 풍경과 늦은 저녁 깔끔한 한정식까지.

내일이면 계절이 옷을 바꿔 입는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가을을 이렇게 완벽하게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느리게 길을 걷다 보니 저절로 풍경이 찾아왔다. 고마운 길을 기억하고, 내년에 받아 볼 오늘의 감정을 적은 엽서가 더욱 기다려진다. 아무래도 겨울 길을 한 번 더 나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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