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걷다, 경주

보며 걷는 일상이 신라

by 벽우 김영래

죽령을 향해 달리는 길엔 보석처럼 반짝이는 나무와 아스라한 운무가 어우러져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겨울이 융단처럼 펼쳐져있었다. 차창에 부딪치는 바람 외에는 모두 고요했다.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 영화에서나 가능한가? 아니다. 4km 남짓한 죽령터널을 지나고 나니 타임머신은 현실에서도 가능했다. 북서풍은 산을 넘지 못해 칼을 품은 듯 차가웠고, 동남풍은 산에 막혀 맴돌다 따스한 햇살에 녹아 물렁했다. 차에 표시되는 온도가 3도 이상 차이가 났다. 재(嶺)가 바로 타임머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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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다다르기 전에 몇 개의 터널을 지났다.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내가 지나온 계절보다 한참 늦은 계절을 맞았다. 경주에 도착했을 땐 계절을 넘어 뭉터기로 뒤쳐진 천 년 전의 시간 위에 닿아 있었다.


그곳은 고대와 미래도시가 혼재된 느낌이었다. 얼굴 미소 수막새와 치미 그리고 천마도를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다리와 건물 등 곳곳에 자랑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눈에 가득 보이는 기와지붕과 거대한 무덤은 이 도시의 오래된 관습 같은 아이덴티티처럼 보였다. 고대의 왕들은 수 만평의 땅을 지고 누웠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기에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줘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조차도 거대했고, 비로소 지배의 힘을 얻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 위세는 여전히 굳건하고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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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나들 한옥 기와지붕을 지나 마루 끝으로 따습게 떨어졌다. 짐 가방을 놓고 마루에 앉았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도 아침 햇살을 받아 마루가 따뜻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우리를 안내하기 전까지 볕을 쬐며 장독대와 담장 밖으로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에 마취되어 꼼짝 않고 있었다. 호텔방처럼 화려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았지만 추억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겨울 야자수와 기와지붕들 그리고 몇 걸음밖에 바로 첨성대를 품은 공원을 거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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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작은 물건이나 사건만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개인적인 기억이다. 그러기에 아련하다. 후회와 미련과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체념이 눈사람처럼 뭉쳐있다. 그에 비해 '과거'라는 말은 좀 더 무겁고 크며 바꿀 수 없는 고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개인사에도 물론 쓸 수 있지만 도시나 국가, 역사에 더 어울린다. '고대'라는 말은 과거 보다도 더 먼 시간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시공간의 뉘앙스를 풍긴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비중으로 서열을 가리자면 추억 <과거 <고대의 순이 될 듯하다. 이 도시에서는 중, 고생 시절 수학여행의 추억과 천 년을 이어온 고대도시의 기억과 흔적이 혼재된 많은 사유들이 가볍게 혹은 무겁게 떠다녔다.


겨울 속에서 햇살은 축복이다. 첨성대 주변 공원에 쏟아지는 바람기 없는 햇살 속에서 사유를 줍기에는 걷기가 최고다. '휴식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하정우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만히 있는 쉼보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 쉼이라면 걷기를 해야 한다. 생기를 감춘 금잔디 공원을 걷다 보면 목련과 모과와 이름 모를 나무들 사이로 첨성대가 보인다. 랜드마크가 꼭 높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 나처럼 유명하기만 해도 된다고 첨성대가 말한다. 중국인, 서 아시아인, 서양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라벌이 다시 부활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첨성대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운영을 지고 태어났으나 지금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사는 얄궂은 운명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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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사는 건 첨성대만이 아니다. 동궁과 월지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조명을 받은 모습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크기로 치면 동궁이야 중국의 자금성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치면 여기에 비할 바가 못된다. 거기에다 백만 대군이 넘나는 인적을 맞을 일도 없으니 달빛을 가득 품은 운치 있는 월지를 가슴에 담기가 훨씬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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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와 서역의 무역상들이 왕래하던 신라 거리가 황리단길로 불리며 세계인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다. 경주를 방문하기 전 이곳저곳을 검색했더니 맛집과 카페가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릉 길을 걷고 후문을 나와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담장을 허물거나 이쁘게 꾸민 카페와 음식점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외국인과 젊은이들로 생기가 넘쳤다. 옛 신라의 거리가 이러했을 것이다.

새로 지은 황금빛 나무로 2층을 근사하게 올린 한옥보다는 초입의 낡고 허름한 풍채의 건물들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과거와 불편함에 더 집착하고 즐기는 듯했다. 사람들에게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자신의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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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첨성대 공원의 월요일 아침은 썰물의 갯벌처럼 을씨년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듯 어수선하고, 어딘가 허전했다. 일상을 두고 떠나왔던 여행객들이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이곳은 부스스한 민낯의 어색한 아침이 된 것이다. 그나마 아침 햇살이 맑아 다행이었다. 긴 그림자 끝으로 첨성대와 왕릉이 보였다. 여행자에게 햇살과 낯선 풍경이 큰 위로가 되었다. 한옥 마루에 주인아주머니가 준비한 아침이 한 소쿠리 놓여있었다. 삶은 계란과 빵, 과일 몇 조각, 그리고 커피 한 잔이었다. 보자기를 걷자 엎드려 있던 주인의 손길이 화들짝 놀랐고, 객은 행복에 미소를 지었다. 여행이 마주친 일상의 작은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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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와 동궁과 월지, 오릉, 계림의 숲길을 걸었던 신라에서의 하루가 꿈같이 지나갔다. 일상으로 돌아오며 내가 비운 자리에 또 다른 여행객들이 신라의 자리를 채워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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