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천렵(川獵)과 답사를 오가다.

by 벽우 김영래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친구가 왔군.

"왜?"

"오늘 뭐해?"

"네가 올 줄 알았나 봐. 오래간만에 프리 하지."

"잘 됐군. 어항 노러 가자."

진짜 수년만에 냇가에 가는 지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기대도 됐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친구는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가는 길에 낚시점에 들러 플라스틱 어항을 두 개와 떡밥을 사고, 또 다른 친구 집에서 족대를 빌려서 쌍용 냇가로 갔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눈 앞에 나타나는 공장의 거대한 철구조물과 흰 연기,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옛 건물들의 조화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가 아닌 미래도시를 연상시켰다. 쌍용역 앞 개울은 물이 말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어릴 적엔 매년 한 두 번씩 개울이 가득 차도록 큰 물이 나갔고, 가뭄이 들 때도 동네 아이들 멱감을 정도로 깨끗한 하천이었는데 이제는 영 글렀다. 보 위 상황은 좀 나아 보였다. 무릎까지 오는 물에 수초도 흔들리고, 피라미와 브러지, 송사리 떼가 물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다리 위에서 정찰을 끝내고 물가로 내려갔다. 돌멩이 사이로 다슬기도 많았다. 어항을 놓기엔 안성맞춤인 듯했다. 떡밥을 개 어항에 붙여 물살 깊은 곳에 살포시 놓았다. 기다리는 동안 잠시 다슬기를 주웠다. 한 15분쯤 지났을까. 꽤 많은 고기들이 갇혀 있었다.

드나드는 곳이 항상 열려 있음에도 고기들은 막힌 가장자리에서만 몸부림치고 있었다. 오직 한결같은 습성이 원시부족 때부터 지금까지 인류를 지켜낸 것이 아닐까. 안타까운 본능적 습성이 내겐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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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을 놓고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엔 문화유산 답사를 했다. 첫 번째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는 서곡 정사로 갔다. 느티나무 그늘에 도구들을 놓고 철길을 건너 한 200m 올라가니 작고 아담한 절이 보였다. 안내 입석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키 작은 삼층탑 옆에 안내문이 있는데 문화재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 닫힌 도량 문을 여니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간 빛을 가득 받은 부처님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었다. 작지만 모든 기원을 다 받아 줄만큼 넉넉한 표정이었다.

마당 한 귀퉁이. 잡초를 뽑고 있는 스님은 드나드는 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은 마냥 한가롭다. 한 여름 나무 그늘 아래서 무념무상의 참선수행이 바로 이런 거라며. 나오는 길가 보라색 도라지꽃이 도열해 은은하게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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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을 한번 건져냈다 넣고 두 번째 창령사지(蒼領寺地)로 향했다. 도(道) 경계를 넘어 수박으로 유명한 충북 단양 어상천 초입을 지나 다시 강원도 땅으로 들어섰다. 선이 그어져 있지 않으니 도계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구분 지었으나, 사람이 알 수 없었고, 산이나 밭은 개념 없이 푸르렀다. 바람도 자유롭게 오갔다.

여느 폐사지처럼 텅 빈 뜰이 한가로이 외로웠다. 무성한 잡초에 싸여 이끼를 두른 돌덩이와 기와 조각들이 천년의 시간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절터 유래와 추측 연대 그리고 의미를 담은 안내표지만 달랑 하나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러닝셔츠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촌로 한 분이 검둥개 한 마리를 데리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왔다 절터 구경 왔습니다." 했더니 새로 지은 대웅전 문을 열어 나한상을 보여주었다. 제각각의 표정을 한 십 여개의 나한상들이 부처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 자기류 등은 춘천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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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바다가 펼쳐진 수박밭엔 수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국방색 무늬에 동색으로 감쪽같이 위장을 하고 있어 그냥 지나칠뻔했다. 싱싱하고 큼직한 수박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했다. 넉넉하고 달콤한 감정이 갈증에 물 한 모금처럼 빠르게 내 가슴을 행복과 환희로 채웠다. 좋았다.

7월 중순. 게으른 오후, 하늘에서 내리쬐는 따가운 햇살과 정지화면 같은 시골마을에 축 쳐진 옥수수 잎에 위로 같은 바람만이 느리게 지나고 있었다.


친구와 단 둘이 천렵과 답사를 오간 휴일 하루. 느티나무 아래로 흐르는 수로에 발을 씻었다. 찬물의 청량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개운한 추억이 또 한 겹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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