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먼저 찾는 폐사지, 거돈사터

꿈과 상상을 만나는 빈터

by 벽우 김영래

아무도 없는 곳에서 꿈꾸길 바라거든 폐사지에 가야 한다.

사람 기준에선 텅 비었고, 자연 기준에서 보면 바람과 햇살로 가득 찼다. 그러니 내가 누군가에 따라 비기도 가득하기도 하다.

내일이면 3월이다. 올핸 춥지 않은 겨울이 었지만 유독 3월이 그리웠다. 3월이 되면 추워도 봄이니까. 엊그제 밤엔 남몰래 눈이 내렸다. 무채색 겨울을 지키려고 그랬나 보다. 하지만 거돈사지에선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눈을 내렸던 하늘을 향해 꽃망울 틔운 산수유 가지가 삿대질하듯 치켜 올라있다. 눈이 겨울 수묵화를 지키려다 외려 봄의 수채화만 더 빨리 그린 셈이 돼버렸다. 아뿔싸 들판까지 향기롭다. 겨울의 후회는 이미 늦었다. 금잔디 위를 걷는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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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때문에 스스로 유폐한 공간을 견딜 수 없어 떠나야 한다면 이곳이다. 두 시쯤 도착이 적당하다. 살랑대는 바람과 향긋한 봄 향기. 따사로운 이 풍경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면 그냥 걸으면 된다. 산수유와 매실나무 가지 끝에 봉긋한 꽃망울과 질척한 땅 위로 붉은 새 잎을 내는 시금치 풀과 금잔디 사이에서 더 샛노란 민들레와 돌계단 틈새에서 으스대며 새잎을 낸 어깨 떡 벌린 들풀과 돌담 위에 앉았다 투명한 햇살 받은 이끼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넘친다.

소리도 즐겁다. 귓가를 맴도는 꿀벌의 날개소리와 길 건너 무논에서 겨울을 깨고 나온 두꺼비 울음도 들린다. 승묘 탑 주변 무채색 나무들 속에서 가늘고 얇은 새소리가 들린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감각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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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묘 탑에서 빈 터로 내려오는 계단은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 계단을 내려오면 다른 귀퉁이로 돌아가야 계단이 있다. 또 몇 걸음 걸어 계단을 찾아 내려가면 다시 한 바퀴를 돈다. 계단 끝에서 바로 이어지는 계단을 만나지 않는 구조가 천만다행이다. 내가 천만다행으로 느끼는 이유와 만든 이의 이유가 같을 것이다. 그 속내를 읽어 냈다니 내가 좀 대견하네. 그렇지 세상에 성급해서 좋은 건 없어. 검은 이끼 옷을 입은 돌담의 정겹고 키 낮은 선이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건 겨울 외투만큼이나 두꺼운 세월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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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터에 오르니 겨울 흙들이 봄에 겨워 부풀어 올라있다. 내가 밟고 지나온 발자국이 선명하다. 작은 지주돌 앞에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본다. 화려하고 영화롭던 과거와 바람과 햇살 한 조각뿐인 텅 빈 작은 돌 위의 쓸쓸함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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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안 물어봐도 알 수 있다. 누구나 '코로나 19'에 갇혀 살고 있을게다. 무심히 만나는 작은 돌부리 하나가 숨을 쉰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불쑥불쑥 내 삶에 끼어드는 심난한 나날들이다.

그러니 여기서 만큼은 한가롭게 숨 쉬고 햇볕을 쬐도 좋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느리게 걸어도 좋다. 눈 감고 꿈꾸고 상상도 할 수 있다. 빈 절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꿈같이 간다. 욕심을 너무 덜어내 빈 털털이가 될 수 있다. 너무 가벼워져 바람에 날려 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뉘엿뉘엿 해 질 녘 돌아오는 길 위에서 풍선같이 변한 새로운 나를 만나려면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말고 그냥 그곳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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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 둘

부도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며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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