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처럼 애잔한 부여, 아! 백제

by 벽우 김영래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은 에너지가 넘친다. 문득 나른함도 덮친다. 금강을 훌쩍 건너는 백제대교 위에서 바라보는 강물의 반짝이는 물비늘에서 결기가 느껴진다. 이것이 백제라는 듯.

부여로 여행을 시작할 때 찬란하게 꽃 피웠다 가뭇없이 지는 봄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게 꼭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황에 맞춰 느낌이 만들어지고, 느낌은 내면의 감정을 더 크고 말랑하게 빵 반죽처럼 부풀린다. 백제라는 나라의 역사적 상황이나 배경은 신라와 딴판이다. 전쟁에서 패한 후 소멸된 나라를 역사로 배운 선입감 때문이리라. 그래서 백제를 부를 때 '아!'라는 짧은 감탄사를 붙여야만 할 것 같다. 기쁨이나 환호가 넘치는 감탄이 아닌,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처럼 애잔하고, 뭔가 빠진 듯 허전하며, 앙금처럼 가라앉은 고요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백제를 부를 때 그냥 '백제'라 부르지 말고 '아! 백제'로 불러보라. 소리 내어 한 번 불러보라. 다르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 갔다. 가람이 화려하게 배치된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면 지금 석탑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을 듯싶다. 텅 빈 들판에 홀로 외로움을 뽑내 듯 가지런하고 정교하다. 나는 탑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기원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한 간절함이. 탑에 손을 모으면 아름다운 기원들이 꼭 이뤄질 것만 같다. 나도 누군가를 위한 기원을 담아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사실은 그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이 결국은 나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안다. 그 세속적인 욕심마저 말끔하게 비워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한결 가볍다. 그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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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연잎밥으로 먹었다. 밥의 반은 향기와 상큼함으로 먹은 듯했다. 건강을 넣었다. 식당을 나와 길 건너에 있는 궁남지를 걸었다. 걷지 않는 사색은 없다지만 연못을 둘러보는 걸음에는 무념무상의 고요와 여유가 함께했다. 휴일임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탑에서 애잔을 느꼈다면 궁남지엔 여유가 넘쳤다. 7월이면 가득 필 연꽃들이 한 두 송이 드문드문 피었고, 수로를 따라 능수버들과 수선화들이 구부정한 흙길과 어울려 멋드러 진 풍경화를 그려냈다. 포룡정을 바라보기 좋은 의자에 앉아서 등 따숩게 햇살을 맞았다. 안에서는 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그랬는지 밖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훨씬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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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강한 억압과 착취라도 시의 깃발을 보면 저항과 죽음의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부여로 향할 때부터 신동엽 문학관에 꼭 들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껍데기는 가라/4월도 알맹이나 남고 껍데기는 가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치던 젊은 시절이 상기되어서도 아니다. 임옥상의 '시의 깃발'을 직접 보고 싶었다. 어찌 시를 이리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안 봐도 알 수 있게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시의 글자 깃발들이 펄럭였다. 예술의 상상력에 도취되었다. 아무리 강한 억압과 착취라도 시의 깃발을 보면 저항과 죽음의 두려움을 걷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펜은 칼 보다 강하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시는 위대하고 예술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한다. 문화는 문명의 척도다. 백제가 비록 패망의 길을 걸었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가 찬란했던 문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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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이미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전쟁에서 패한 후 망국의 슬픔을 더 큰 슬픔으로 기억하려 했던 낙화암이 아닐까. 삼천궁녀의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구드렛 나루터에서 황포 돛단배를 타려고 했는데 빗방울이 떨어져 강물만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흑백사진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수학여행지로 몇 번을 다녀온 곳이기에 아쉬움은 덜었다. 나루터 곳곳엔 백제가 부활한 듯 깃발들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서너 달 전 세미나가 있어 우연찮게 들렀던 '세간'책방이 생각나 숙소에 가기 전 자온길에 다시 들렀다. 경주 황리단길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언젠가 그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 한 권을 샀다. 그게 큰 힘이 될까만은 강물이 처음부터 강물이 아니었듯 시작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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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은 달려 생활의 바운더리를 벗어나야 비로소 여행 온 기분이 난다. 사람이 북적대는 곳엔 여유가 없어 좋지 않다. 압도적인 스케일도 아니고 작은 웅덩이 같은 소소한 이야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여, 사나흘 머물며 한 바퀴 걸으며 음미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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