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소설 - 몽 단양 유람기

by 벽우 김영래

'제 글이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날 굳이 저까지 보태지 않아도 이미 훌륭한 글이 차고 넘친다는 걸 떠올립니다. 세상 모든 책들 가운데 0.1퍼센트도 채 읽지 못하고 다들 떠나겠지만 , 그렇게 읽어낸 글 속에서 얻은 건 많았습니다.... 이도우 장편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p353 중.


나는 뭔가에 홀린 듯 평소에 잘 마시지 않던 커피를 석 잔이나 마셨다.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었다. 일어나서 뭘 하자니 월요일 아침 출근이 걱정돼 어떻게든 잠들어 보려고 이리저리 뒤척였다. 비눗방울 속에 갇힌 무지갯빛 잡념이 내 암막을 둥실둥실 떠다녔다.


새한서점에 가 보자고 꽤 오래전부터 아내를 졸랐다. 어떤 날은 내가 피곤해서 일찌감치 포기를 했고, 또 어느 날은 꼭 가봐야지 하고 아침에 계획을 하고 오후에 잊어버리기도 했다. 더위와 사람들을 피해 암행어사 잠행처럼 다닐 수 있는 한적한 곳이 바로 숲 속 책방이 제격일 듯했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새한서점에는 책방 주인의 기대감에 반비례하는 만큼의 방문객 서너 명만이 서가를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새한서점을 가겠노라 노래하게 된 것에는 다름 아닌 이런 연유가 있었다. 한가로운 노후를 위해 책방을 운영해 보고 싶은 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내게는 넘지 못할 커다란 장벽이 하나 있었다. 40대 중반쯤 되었을 때 아내가 어디서 점을 봤는데 '남편이 인생 말년에 사업을 하면 망하니 절대로 시키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점장이 말을 지금까지 인생철학처럼 믿고 있고, 내가 뭘 얘기하면 면전에서 그 말을 불경처럼 외워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가 아내의 인생철학을 깰 고심을 하던 끝에 특별히 돈이 들지 않고, 더욱이나 돈도 되지 않아 위험도, 자유를 구속하는 속박도 없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 떠올린 게 헌책방 또는 북카페였다.

돈이 있다면 한옥 한 채 지면 좋겠지만 그런 복이 예전에 없는지라 낡은 시골집에 지금 몇 권 안 되는 책이나 놓고 읽고, 쓰면서 한량처럼 살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아내도 큰 위험부담 없다는 듯 그 정도는 말리지 않았다.


새한서점 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0여 년 전 화재조사 담당업무를 할 때 1박 2일 촬영을 하고 유명세를 얻을 무렵 화재 신고가 들어와서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며칠 전 홈피에 들어가 보니 인문학, 사회학 등으로 나름 분류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인터넷으로도 주문받는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보아 문 닫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주인장이 혹시나 문을 닫으면 헌책을 싸게 얻을 수 있을까. 서점을 인수하면 어떨까 하는 욕심까지 부렸는데.

현곡리 마을 입구 느티나무를 지나면서부터는 외길 었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작은 산길을 넘어가니 안내표지판 역할을 하는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서있다. 차량 진입금지. 걸어서 200m라는 글귀가 간신히 보일 정도로 작게 적혀있었다. 예전에 왔던 길과 달랐다. 밭길을 한참 내려가니 등산로 같은 오솔길로 접어 들 무렵 파란 함석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을 건너 책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그럴듯한 테이블에 의자까지 놓여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헌책방스러운 낡은 지붕과 덧댄 나무기둥, 벽 그리고 불안정한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지런히 진열된 새책과 몇 가지 책방 굿즈들이었다.

비스듬한 경사에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책방 통로는 영국 왕립도서관 부럽지 않은 풍경이었다. 헌책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좋았다. 흙바닥이라 울퉁불퉁했지만 물이 흘러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꽤 많은 책들이 가지런히 혹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통로 쪽 책꽂이에는 작은 종이로 세계문학, 한국문학, 시험 서적, 학습지, 만화 등 분류표시가 되어 있었다. 책 모양을 갖춘 것들은 다 있는 듯했다.

서울의 대형서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지만 서적의 종류와 양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듯했다. 처음엔 주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토지'를 읽는다는 유시민 씨의 습관이나 따라 하려고 여기저기 뒤적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몽 1.

검은 털에 군데군데 염색을 한 것처럼 빛바랜 노란 털을 입은 묘(猫) 집사가 서가를 감시하듯 어슬렁 거렸고,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천정 높이까지 쌓인 헌책들 사이를 오가며 사진도 찍었다. 서가에 빼곡한 책 제목들이 자기를 뽑내 듯 제각각의 크기와 높낮이로 선택을 기다리는 그곳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나의 부질없는 글쓰기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것들 속에 제목도 다 읽지 못하고 보내야 하는데 소설 한 줄처럼 '나까지 보태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토존처럼 꾸며놓은 간이 의자 옆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책을 꺼내지 말라는 안내문이 포트 잇 종이에 적혀 있었다. 나는 책 읽는 사진도 찍고 이곳에 별도의 요금도 없으니 보템이라도 될까 싶어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과 한국 고전수필집을 샀다. 맨 꼭대기 서가가 시작되는 반지하 같은 좁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주인은 백열등에 얼굴만 간신히 보일 뿐 인사말도, 얼마라는 말도 없이 건네는 만원에서 3천 원을 거슬러 주었다. 고맙다, 잘 가라는 인사도 없었다.

젠장! 헌책의 싼값 구매나 책방 인수는커녕 무뚝뚝함에 질려 말 한마디 붙이지도 못하고 그냥 왔다. 꿈이 컸구나.

중간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오니 아내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녹초가 됐는지 다리를 만져도 눈을 뜨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이고 더구나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신뢰가 두터웠나. 두 삶의 경계가 이렇게 허물어지나 싶어 새삼 놀라웠다.


몽 2.

멀리 청풍호를 내려다보며 수양개 유적 박물관을 지나가는 도로는 늦은 일요일 오후라 최고속도가 30km였다. 누가 다그치며 뒤를 쫓지도 않았다. 느림의 미학은 이끼 터널과 빛 터널까지 이어져 있다. 즐기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창문을 열고 산 냄새 물 냄새를 맡으며 달릴 수 있는 이 도로를 거북이 도로로 명명하고 최고속도를 30km로 규정해야 한다. 양 옆으로 이끼가 융단처럼 깔린 곧은길 끝에 젊은 여자 여행객 서너 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 차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잠시 눈이 시원했던 풍경에서 다시 강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도심을 통과하려니 신호와 주차된 차들로 분주했고, 천천히 달렸더니 내 옆으로 차들이 삐친 사람처럼 쌩쌩 스쳐갔다.


몽 3.

cafe sann이 있는 곳이 예전엔 감자마을이었다. 산꼭대기에 있어 오르는 길도 좁고 위험했는데 언제부턴가 '패러 마을'로 인식되며 사람들이 찾고, 펜션이 들어서고 급기야는 인터넷에서 핫플레이스로 떴다. 레저를 즐기며 산 능선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곳.

이곳처럼 인생도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미루나무가 도열한 신작로 길 옆에 있던 집들은 담장에 흙탕물 범벅이 되고 마루엔 뿌연 흙먼지가 뒤덮였는데 어느 날 포장도로가 생기고 차가 다니고 사람이 많이 오가면서 몸값이 달라졌다. 이제는 길을 곁에 두지 않으면 눈길도 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간신히 길만 있으면 어디든 사람이 찾아간다. 풍경과 분위기만 있으면 된다.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 역전 현상은 또 어떻게 변할까. 하늘이나 물속 어디쯤이 될 수도 있다. 짧은 소견으로는 당최 가늠할 수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눈이 뻑뻑했고 잠을 잔 건지 꿈만 꾼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밤새도록 새한서점 인수 작업을 하고, 최고속도 30km의 꿈같은 길을 달리며 전망 좋은 산 꼭대기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몽롱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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