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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경 Apr 27. 2024

하얀 털모자

그리고 전화가 왔다. 

화장실을 가려고 배쓰룸? 하고 물었더니 문 앞까지 데려다준다. 땡큐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땡큐 할 거면 말로만 하던지 고개를 숙일 거면 땡큐를 하고 숙이던지 둘을 동시에 하지는 말라고 여기 오기 전에 오빠가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도통 동서양의 만남 인사방법을 고칠 길이 없으니 애석하다.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너무 놀랐다. 일단 금테가 둘러진 거울이 너무 크고 슬리퍼가 화려했다. 물기가 하나도 없는 화장실은 처음이다. 변기에 앉기가 황송할 정도였다. 수건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정갈해서 내가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손을 한 번 더 씻고 나왔더니 둥그런 탁자 가운데 과일과 과자가 놓여있었다. 과자는 처음 보는 작고 네모난 갈색 쿠키였고 과일은 딸기였다. 한겨울의 딸기라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딸기가 여기 탁자에 놓여있다. 드시라는 손짓은 만국 공통인 것 같다. 딸기를 포크로 찍어 먹어보았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기 온 이후로 처음 맛보는 비타민의 짜릿함이었다. 나를 신기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측은하게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딸기가 너무 맛있어서 살짝만 웃어 보이고 세 개나 연달아 먹었다.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는데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봤던 방문이 살짝 열렸다 닫혔다. 우리 셋의 눈이 마주쳤다. 눈이 큰 여학생과 어머니는 잠시 당황하더니 묻지 않은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방안에 오빠가 있어. 여자 손님이 오면 오빠는 방에서 안 나와. 아니 나오지 못해. 왜? 그냥 원래 그래. 딸기 먹고 싶어 하지 않을까? 오빠는 딸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것 참 애석하네. 를 영어로 말하고 싶었는데 으응……. 하고 말았다. 오빠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오빠가 딸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 오빠라면 내 친구가 와도 딸기를 같이 먹으러 나왔을 텐데. 마지막 남은 딸기를 나에게 권하며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곤 모자를 선물해 주었다. 내가 모자를 쓰지 않고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고작 하루 만났는데 그런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는구나. 사실은 모자가 너무나 필요했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에선 모자를 쓰지 않으면 귀의 감각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모자를 쓰는 것이 영 어색해서 살까 말까만 백번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뜻한 털이 안쪽에 빼곡한 흰색 모자를 선물 받았다. 예쁘다.      


안에 하얀색 털이 빼곡한 모자를 쓰고 아직도 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집으로 오는 길에 쓸데없이 눈물이 났다. 오빠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하이. 이후로 말씀이 없으셨고 눈이 큰 여학생과 나는 더듬더듬 안 되는 영어로 대화를 어떻게든 이어가다가 어색한 침묵이 서너 번 흘렀고 화장실을 비롯한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했고 슬리퍼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서 발가락을 자꾸만 오므리게 되었는데, 그래도, 너무나 따뜻한 가정의 느낌이 오래간만이라 눈물이 났다. 다행히 눈발이 얼굴을 세차게 때려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도 창피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모두 얼굴은 아래로 향한 채 빠르게 걷고 있었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해서 장갑을 벗고 목도리를 벗고 외투를 벗고 모자를 벗으려다 좀 더 쓰고 있었다. 따뜻하다. 손을 씻고 따뜻한 차를 마셔볼까 하고 물을 올리고 가방에서 숙제를 꺼내는 동안에도 계속 쓰고 있었다. 따뜻하고 예쁜 모자를 오랜만에 써보기도 했고 아직 귀가 너무 시렸고 그 따뜻한 온기를 조금만 더 느낀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내일은 눈이 아무리 오더라도 꼭 수업에 가겠다고 했다. 기다려진다. 정해진 자리는 없기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책상을 사수해야 한다. 안 그래도 아침 일찍 수업인데 더 일찍 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난다. 난 대체로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수업시간에 맞추어 가는 것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엄청난 수업료를 냈고 저렴하다고 하지만 한 달 월급을 털어 비행기 표를 샀고 어쨌든 일 년을 살아갈 돈이 빠듯했고 이 수업을 열심히 들어 유창한 영어를 하길 바랐고 그래서 좋은 일자리를 얻기를 바랐다. 여기서 나는 정착을 해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이 수업에 매달려야 했으므로 태생이 아침형 인간이 아닌 몸뚱어리를 아침형으로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태였다. 눈이 큰 여학생의 어머니가 모자를 주시면서 살짝 등을 두드려 주시고는 굿바이. 해주셨는데 내 모든 안간힘이 어머니의 굿바이에 담대함으로 바뀌어 척척척 앞으로 어디까지고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흐르는 눈물은 그대로 두고 눈발을 헤치며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긴 하루 끝에 비로소 누웠지만, 매트리스는 차가웠고 이불도 차가웠다. 방바닥이 절절 끓는 아랫목이 그립지만, 이불은 하나 더 덮으면 되지. 하다 땡큐소머치. 갑자기 속삭여본다. 뭐야. 이제 혼잣말도 영어로 하는 거야? 생각하다 이불을 하나 더 가져오는 대신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는다.  

    

한밤중에 갑자기 배가 아팠다. 일어나 앉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살면서 이런 통증은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은땀이 계속 흐르고 배는 계속해서 아팠다. 전화기를 찾아 단축번호를 눌렀다. 눈이 큰 여학생이었다. 헬로. 를 하자마자 정신을 잃었나 보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전화를 끊고 집으로 달려와 주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이 큰 병원이었는데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는 나는 119를 불러 달라고 했다. 눈이 큰 여학생은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119는 빠르게 도착했다. 바로 옆이 병원이라 채 1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들것에 실려 응급차에 도착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내내 내 손을 잡은 여학생의 온기를 느끼며 오락가락하는 정신줄을 붙잡으려 애썼다. 응급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에서도 선명한 빨간 피를 흘리는 터번을 쓴 남성이 보였고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이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멀쩡한 나에게 간호사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학생이 다시 한번 나의 존재를 알려준 이후에 겨우 간호사 도착해서 어디가 아프냐고 했다. 손을 겨우 들어 배 쪽을 가리켰다. 오케이 하더니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온다. 이걸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손을 들 힘조차 없는데 눈을 겨우 떠서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질문은 엄마의 미들네임은?이었다.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엄마는 미들네임이 없을뿐더러 그걸 지금 왜 적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여학생은 더듬더듬 나에게 모든 질문을 하고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초음파실에 누워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침대 옆에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여학생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와 아유오케이? 묻는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의사는 곧 온다고 했다. 복부 초음파를 찍는 곳인데 보호자도 같이 들어올 수 있는 모양이다. 보호자. 눈이 큰 여학생은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지난밤 동안 나의 보호자로 내 곁을 계속 지켜주었다. 의사가 들어오고 배 여기저기를 보더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토하고 정신을 잃고 토하고 정신을 잃기를 밤새 반복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초음파실을 빠져나오니 벌써 아침이 되었다. 이제는 걸을 수 있다. 오늘 수업은 못 갈 것 같다고 하니 나도 가지 않겠다며 괜찮다는 나를 뒤로하고 앞서 걸어 집에 함께 왔다. 냉장고를 열어보곤 한숨을 쉬었다. 누워있어. 내가 장을 좀 봐올게, 지금 뭘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뭘 먹어야지.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웠다. 밤새 시달린 나는 눕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달그락 소리에 눈을 뜨니 부엌에서 냄비에 무언가 만들고 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생활 소음이다. 눈을 다시 감고 냄비에 무언가는 휘휘 젓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또 눈물이 났다. 휘휘 젓는 소리가 뭐라고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반대편으로 뒤돌아 누웠는데 이내 어깨를 톡톡. 좀 먹어봐. 그래. 힘겹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는데 눈앞에 양송이 수프가 있었다. 그래서 휘휘 많이 저었구나. 같이 먹자. 그래. 나도 배고팠어. 웃으며 한술 뜨는데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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