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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타조 Sep 27. 2020

자유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철학으로 생각하는 일상

일주일 중 가장 편하게 느끼는 시간은 일요일 오전이다. 그때쯤면 회사 생각은 작아지고, 불금처럼 마냥 들뜬 마음도 없다 (평소에도 불금같은 기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토요일도 좋다. 다만 토요일은 한주동안 미뤄왔던 가족들과 약속 지켜야 하는지라 내 시간이 일정하지 않을때가 많다. 일요일 오후도 별로다. 다음날 출근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해봐도 일요일 오전이 제일  편안한 시간이라 결론 내려본다.
요즘 이자주 카페로 향한다. 몇번의 실패 끝에 동네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아냈고, 거기서 연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한두 시간 아껴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한주동안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을 글로 쓰며 보내는 기분이 좋다. 아마 내가 가장 자유로운 시간인 것 같다.


"김과장, 보통 주말에 뭐해?"
마음이 드는 사람이면 한 번씩 이렇게 물어본다. 한가하면, 자기 시간이 생기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자 너한테 관심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면 자신 있게 무엇을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냥 뭐...' 이런 식이다. 티브이나 영화를 본다거나, 잠을 보충한다던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사람도 있고 별거 없다거나 아무것도 안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허나 막상 더 캐물어 보면 대부분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을 배우고 싶다던가, 어떤 모임에 참여하고 싶다던가, 아니면 어디에 가고 싶다는 식으로 욕망을 품고 살지만, 하지 못하고  산다고 말한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현실적 이유 때문이, 각자의 자유 무엇에게 구속받고 있.

에리히 프롬(좌)과 그의 저서


미국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자유를 포기하고 도망치는 경향을 띤다고 주장했다. 특히, 예로 파시즘을 추종한 20세기의 사람들을 든다. 중세 봉건제도에서 인간이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러냈다.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들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에게 자유를 헌납하고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파시스트의 결정에 따르며 열광하고 전쟁에 기꺼이 참여한다. 심지어 추종자들의 구성을 보면 소상공인, 장인, 사무직 근로자 같이 하층민이나 중산층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오랜 기간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바로 그 계층들이었다. 자유를 헌납한 사람들의 심리적 이유를 프롬은 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세의 구속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이후 자본주의적 질서가 다시 만들어졌다. 그들이 자유롭긴 하지만, 이 사회 구조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외와 도태의 감정이 그들에게 불안과 무기력을 주었다'라고 설명한다. 자유롭지만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며, 차라리 새로운 구속을 찾게 되는데, 파시즘이 대안이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프롬은' 자유의 이중성'이라 불렀다. 샤르트르도 유사하게 '자유의 형벌'이라는 표현을 썼다. 사람들이 정작 자유를 가지게 되면 행동의 규칙과 지침이 없어서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는 귀찮고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며, 이런 의미로 형벌이라고 표현했다.
형벌은 20세기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디지털 노마드", "전원주택", "배낭여행", 대안학교"
평소 내가 좋아하는 것 들이다. 그래서, 마음에 두거나 언젠가는 할 거라며 긴가민가 고민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지금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으니 매일 직장을 나가는 것이고, 지금 사는 곳이 부족하여 더 자유로운 전원주택을 꿈꾸고 산다. 일상의 공간적 제약과 식상함은 또한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나는 여행을 갈망하게 만든다.
허나, 마음만 있을 뿐이지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산다. 디지털 노마드족을 하려면, 지금 소유한 직장과 경제적 상실, 그리고 잘못될 경우에 대한 위험을 생각하게 한다. 전원주택은 출퇴근, 편의시설, 아이 교육과 같은 다른 이로움의 상실을 생각해야 한다. 배낭여행을 가려면 오랜 시간 일상을 비워야 하고, 경제적 문제에 대한 포기가 필요하다. 아이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육과 사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안학교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 선택으로 아이들이 경쟁에 뒤쳐질까 하는 생각들이 망설이게 만든다. 하고 싶은 일은 있고  아무도 말리는 이는 없지만,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자유롭지만 얽매여 사는 꼴이다. 내 이야기를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다를바 없이 산다.  그리고, 매여 사는 이유에는 프롬의 말처럼 소외와 도태라는 이유가 존재한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면 상실의 문제가 일어나고 소외와 도태의 두려움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소외와 도태의 두 감정은 공통점이 있다. 혼자 있을 때는 들지 않는 감정이다. 누구로부터 소외되고 누구에 비해 도태되니까, 사회적 감정이다.  
그런 의미로 자유는 남의 시선에는 상관없이 혼자 떨어져 살아도 되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된다. 자유의 대가를  감당할 용기 말이다


일요일 오전에 카페에서 보내는 내 자유를 프롬이 고민한 자유에 비하는 건 너무 가벼운 일이다. 앞서 내가 하고픈 디지털 노마드족으로 살겠다던가, 아파트를 버리고 전원주택으로 이사 가는 선택 정도가 되어야 프롬의 자유와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를 고민하기에는 현실적인 일들이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그래서 못하고 있는 현실이 가혹해서 또 괴롭다. 일요일 오전 카페에서 누리는 내 잠시의 자유도 의미가 있다. 이 시간은 굳이 소외와 도태를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사람들은 그 마저도 못하고 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자유를 가질 때 무엇을 할지조차 모르고 산다. (30대 시절이 그랬다.)
짧은 시간이라도 자유를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할지를 알아야 하고, 실행하는 성실함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작게나마 자유롭다 보면 커다란 선택을 하는 용기도 길러질 것이다.

자유도 감당이 되어야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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