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사람하고 되게 친하지." '내 보기에는 안 그런데, 대체 뭘 믿고 저리 말하는지. 그러다 마음 상하는 일 만나면 어쩌려고...'
친하다고 믿은 이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정말 아프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이용해서 승진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무시하거나, 심지어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의 감정은 분노를 넘어서, 사는 일에 회의감마저 들게 한다. 반면, 반대의 사람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이가 훅치고 들어오면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아주 사소한 상황이라도 뜻밖의 배려를 받으면 삶의 고단함은 사르륵 녹으며 정말 살맛 나게 만든다
출근길, 올라가는 계단에는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 하늘은 문제없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비가 온다. 우산 없는 나도 계단 끝자락에 서게 되었다. '소나기겠지, 곧 그치겠지.' 기다리기로 했다. 계단 아래에 우산 파는 아저씨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제법 많이 우산을 사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집에 많은 우산들도 그렇고, 회사에도 두 개가 있어서 어떻게든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5분 가량 지났다. 비는 그칠 기미 없이 꾸준하게 오히려 굵기를 더해갔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데, 그냥 우산 아저씨를 찾아갈까.'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다 김 부장님, 늘 같은 시간에 출근하시는 김 부장님이 10분 지나면 여기를 지나가실 거라는 게 생각났다.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리 마음먹으니 출근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토도독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비 내리는 거리 풍경 그리고 사람들. 이 바쁜 시간에 평소 하지 않던 구경이 색다르고 좋았다. 특히, 계단을 오르다 비를 만난 사람들의 표정이 흥미로웠다. 알았다는 듯 우산을 꺼내 드는 자랑스러운 표정, 방금 전 나와 같이 당황하는 얼굴도 있고, 무덤덤히 귀찮은 듯 우산을 꺼내는 사람도 보였다. 오늘은 확실히 우산 아저씨가 대목을 만난 것 같다.
마침 계단으로 지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꼭 김 부장님이 아니더라도...'
애매한 강부장 강부장님은 재작년 개발 프로젝트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나보다 이삼 년 선배 뻘이지만 늘 깎듯이 존대해주었다.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 더 볼일이 없었고 흡연실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헤어졌다. 안부 물어볼 딱 그만큼이고, 더 깊은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강부장님도 우산이 없긴 마찬가지였는지, 조금 머뭇거리다 우산 아저씨를 찾아가서는 재빨리 회사로 향했다. 나는 붙잡지 않았다. 애매한 느낌이라 패스.
생색의 대가, 박부장 박부장님. 오십 대 후반으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회사 고참 부장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옆팀의 팀장이기도 해서 항상 깎듯이 대해야 했다. 그 후 팀장에서 내려오고 최근에 프로젝트 팀으로 옮겼는데, 몇 번 그의 업무를 도와준 적이 있어 오가며 고맙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리고 밥 한번 꼭 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분은 생색내는 데 일가견이 있고, 그것도 여기저기 오랫동안 하는 스타일이라, 점심 사주겠다는 초대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가방에서 작은 3단 우산 하나를 꺼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작은 우산도 그렇지만, 같이 쓰고 가다가 점심 약속이 잡혀버릴까 봐 싫었다. 패스.
오래전 악연, 지팀장. 지팀장, 이 분은 내 대리 시절에, 업무의 고객이자 고객팀의 실세였다. 나에게도, 같은 팀 동료들에게도 지긋지긋하고 몹쓸 갑질을 해대던 악명 높은 정치꾼이기도 했다. 몇 년 전 팀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저런 사람이 팀장이 될까 하며, 분노하기도 했다.
둘이 쓰고도 남을 장우산을 들고 올라왔다. 딱 원하는 그런 우산이지만, 바로 못 본 채 했다. 그가 같이 쓰자고 말하지도 않겠지만, 쓰자고 해도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었다. 또다시 패스.
* 5분 동안 세명의 동료를 보냈다. 그래서, 그냥 5분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반응들을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올라왔다.
그리고, 뜻밖의 박과장 작년 늦장가를 간 친구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층이 다른 부서로 이동해서 만난 지도 제법 되었다. 같이 있을 때는 가끔 업무 논의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좋은 인상을 받았다. 질문의 내용부터 물어보는 태도까지 젠틀한 느낌이었다. 3년가량 같이 있고도, 술 한번, 밥 한번 못했지만, 마주치면 서로 안부를 물어주던 친구였다. 작년 결혼할 때, 깜빡하고 축의금을 챙기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80 키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우산을 손에 들고 있었다. "부장님, 우산이 없으신가 봐요. 같이 쓰고 가시죠" "아냐, 조금 있으면, 아는 사람이 올 거야." 사양했지만, 극구 끌고 가는 바람에 따라나섰다. 회사까지 5분여를 우산 하나 받쳐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건물 안으로 도착하고 복장을 살폈다. 나는 신발과 청바지 아래가 젖었다. 반면 박 과장은 운동화는 물론이고, 긴 기럭지의 면바지의 절반과 왼쪽 어깨도 반이상 젖어 있었다. 사람 참 미안하게 만들어놨다.
박과장의 배려는 연애 시절의 우산을 떠오르게 했다. 그때는 너랑 나랑 우산이 있어도 하나만 받쳐 드는 게 좋았고, 큰 우산보다 작은 우산이 낭만적이었다. "나, 그 사람하고 친해." 이렇게 말하려면, 연인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우산을 같이 쓰는 정도라면 될 것 같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많은 사람들 중 나만이 우산을 가지고 있다. 우산이 필요한 여러 사람 중에서, 가장 받쳐주고 싶은 사람이 친해지고 싶은 사람, 그도 기꺼이 허락한다면 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