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타조 Dec 09. 2020

And I will remain... here

Simon and Garfunkel의 <The Boxer>에서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 타향살이가 뭐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고향을 떠나 살다보면 설움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전력 투구를 했는데도 예전처럼 잘 안된다거나, 낯선 곳이라 어색한 마음이 들거나, 그 때문에 오지게 억울한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까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경우도 스무 살에 서울살이를 시작했으니까, 지나면서 귀향의 마음이 들기도 했고, 나이에 따라 경향을 달리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팔팔하던 이십 대는 실패해도 괜찮아서, 돌아가고픈 욕망은 전혀 없던 반면, 서른 초반에는 가끔씩 찾아왔고, 삽십 후반과 사십을 넘으니 점점 그 빈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제법 심하게 일었는데, 다행히 스스로 답을 내놓은 후에야 욕망이 고분고분해지게 되었다.


70년대 미국 듀오 Simon and Garfunkel 의 <The Boxer>도 귀향 마음을 담고 있다.

아래는 가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In the clearing stands a boxer
and a fighter by his trade
And he carries the reminders of every glove
that laid him down or cut him till he cried out
in his anger and his shame
"I am leaving, I am leaving"
But the fighter still remains

휑한 링위에 한 사람의 복서이자 싸움꾼이 서있네
그의 글러브는 수많은 흔적들이 담겨있다네
분노와 수치심으로 소리 지를 때까지
상대를 때려눕히고 베어 버렸던 그런 흔적들 말이야
"떠날 거야, 떠날 거야" 외쳐보지만
그 싸움꾼은 여전히 남아있다네




중고등학교 시절에 참 많이도 들었던 노래다. 이 곡은 기타소리가 마치 복서가볍게 스텝을 밟듯 가뿐히 뛰어다니는 느낌을 준다. 뒷부분의 후렴구는 인생의 대서사를 표현하듯 점점 웅장하게 계단을 올라간다. '삶이란 이렇게 진지하고 웅장한 것이야'라고 하는것 같다.  

도입하나의 기타 선율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곧이어 저음의 선율 하나가 더해서 합체한. 이 두 개의 기타 화음이 귀 좌우를 울리면, 잠시 즐길 새도 없이 곧장 'I am just a poor boy~'로 시작하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뒤따른다. 둘의 목소리가 통통거리는 기타 멜로디에 실려 가사를 집중하게 한다.

남자들 목소리가 어찌 이리 여리여리하고 나풀거리는지, 10대 '소년소년'이던 내가 이 노래에 푹 빠져버린 이유가 분명히 있다. 영어가 덜 배웠던, 나는 들리는 소리를 그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 암송하기도 했다. 이런 추억의 명곡을 지난주 라디오에서 듣게 되었고, 나는 그때의 소년 마냥 다시 삘이 꽂혔다.



원곡 버전의 링크
https://youtu.be/l3LFML_pxlY

콘서트 버전의 링크

https://youtu.be/6JUbFj0BIc4

가사는 어느 권투 선수 마음을 담고 있다.

(가사의 주인 입장에서 살짝 의역하자면 이렇다.)
거짓과 반항으로 살아오던 보잘것없는 시골 소년이 고향을 떠나왔다. 이후 소년은 낯선 장소를 돌아다니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왔다. 겁에 질리기도 했고 방황하기도 했었다. 수 차례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세상은 소년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매몰차게 밀어내기만 했다. 어떤 때는 창녀들이 유혹하는 그런 곳에서 위안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끝내고 그만 돌아가고 싶다. 뉴욕의 매정한 겨울에 내가 더 이상 괴롭지 않도록, 나를 편안히 쉬게 해 줄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노래는 실존 인물을 모태로 썼다고 한다. Benny Perat이라는 쿠바 출신의 권투선수가 있었는데, 두 번이나 웰터급 챔피언을 한 제법 유명한 선수이기도 했다. 1962년,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Emil Griffihth 와 시합을 하다가 상대에게 연타를 맞아 혼수상태가 되었는데, 며칠 후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폴 사이먼이 이 사연을 듣고 쓴 곡이다.


Benny Perat (좌)과 Emil Griffihth와의 시합 장면


시합 장면 링크

https://youtu.be/s4tgzgjqcFA
(하얀색 트렁크가 Benny이다. 마지막에 연타를 맞는 와중에도 심판이 저지하지 않아, 더 크게 데미지를 입었다고 한다)


죽은 Benny의 사정까지는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아픔으로 살고 있지는 않을까. 젊은 나이에 야망을 품고 고향을 떠났고, 정신없이 휘리릭 살다보니, 그제서야 현실이 느끼게 된다. 잘 안되기도 하고, 해놓은 것도 아주 초라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커져서, 덩달아 회의감도 점차 커진다. 이렇게 사는 일의 끝에는 ('나'에게는 현재 직장 생활의 끝에는) 대충은 어떨 거라고 짐작이 된다. 그러면서, 이럴려고 고향을 떠나왔나, 이 고생을 하려고 학창 시절과 젊음을 불살랐는지 억울해지기까지 한다. 지나온 일이 허무하고, 고생한 것이 야속하며, 다가올 시간이 불안하게 느껴진다.


삶의 링에서 스텝을 밟고 주먹을 날려도, 시합은 쉬이 끝나지 않는다. 또, 희안한 것이 한 상대를 쓰러뜨리면, 완전 다른 상대가 나타난다는 것과 맞은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두들겨대는 잔인함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한다.

'내 고향은 절대 그렇지 않을거라고...'
그곳에 가면 아무도 해하지 않을 것이고, 다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귀향의 마음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삼십 대, 사십 대에 나도 도망가려고 했던 마음이 이런 이유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돌아가고픈 고향은 착각이라고.

어린 시절 고향이 아늑한 것 그때 내가 아이의 신분이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세파를 막아주는 거대한 보호막이 있었다는 사실이 숨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늑한 기억만 남게 된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어른으로 산다면, 완전히 다른 기억일 것이다.

또 한가지는 나는 내가 가진 것들에게 무게를 더 주었다. 내 주변 것들 (가족과 직장과 사람과 집과 자동차와 물건들까지)에게 가치를 더 실어 주면서, 완성품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도 괜찮다고 주문을 걸었던 것 같다.


다음부터 귀향의 욕망이 사그라들었다.

And, I will ramain... here.


작가의 이전글 나의 살던 고향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