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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팜비치 Mar 15. 2019

책 <인생의 베일>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미싯 몸

01. 호감의 발화점
키티는 월터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80%는 여동생의 결혼이라는 상황에서 도피를 위한 충동, 10%는 수줍음 많은 그의 진솔한 고백에 대한 감동, 그리고 나머지 10%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는, 기이한 불가사의함 때문이다. 나는 의외로 마지막 10%가 그녀의 결정에 결정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에서 이 책이 삼류 로맨스가 아닌 문학적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느꼈는데, 만약 월터가 키티가 파악하기 쉬운 부류의 남자였더라면-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단칼에 거절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단조롭고 익숙한 일상에서 어떤 균열의 틈을 발견했을때 찾아오는 생경한 감정은 강력하다. 상대에게서 발견한 미지의 영역은 그것이 나의 오해로 채워질 수 있다는 어떤 공간감만으로도 호감에 불을 붙이기 쉽다.

02. 월터의 사랑 vs 키티의 사랑
혹자는 사랑을 "착각"이라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얄팍한 이해를 기반으로, 나머지 부분은 자신의 욕망에 맞춰 오해하며 착각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다시 만난 찰스의 무가치함(그를 왜 그토록 사랑했는지)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키티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우매한 사랑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똑똑한 월터는 키티를 꽤나 온전히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에 대한 환상이 없어. 나는 당신이 어리석고 경박한 데다 머리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있었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했어....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때때로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해하거나 당신에게서 유쾌한 애정의 눈빛을 느꼈을때 황홀했어 ...."
키티의 부정을 알게된 뒤 그녀에게 고하는 그의 절절한 분노의 마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키티의 부족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발랄함을 사랑했던 그. 자신에게 독이될 것을 알지만 상대에 맞춰 그 바닥까지 자신을 끌어내리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성숙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

03. 모순
월터는 키티의 부정을 끌어안고, 아주 느린 동반 자살을 택한다. 그들이 죽음의 위험과 힘겨루기를 하며, 서로에 대한 복수심과 애증의 마음으로 먹는 샐러드는 날 것 그대로의 강렬한 감정 그 자체다. 부정과 증오, 경멸과 복수심으로 떠나온 땅에서 월터는 병든 아이들과 수녀들에게 구원의 존재가 된다. 그 곳에서 키티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의 쓸모를 다하는 존재론적 구원을 체험한다. 자신의 부정에서 출발한 모든 여정이, 결국은 그녀를 영웅으로 포장되게 만든다. "죽은건 결국 개였다"는 월터의 유언처럼, 이 책의 모든 모순된 서사가 주는 어떤 탄식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인생의 베일이자 문학의 힘일지 모르겠다.

04. 사랑의 불균형이랑 잔인함
04-1.키티는 불륜을 통해 처음으로 사랑을 배우고서야, 자신을 향한 월터의 사랑을 이해한다. 그의 하루 날씨가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려 있었던 것을. 약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게 약자였던 이의 모습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잔인한 속성이다. 그녀는 그에 대해 동정심을 품게 되지만, 끝까지 그를 사랑하지는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임을 알고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잔인한 일이다.
04-2. 키티는 월터에게, 찰스는 키티에게, “그만 키스하고, 잊고, 친구가 되자” 말한다. 그러지 못하는 상대를 "유머감각이 없고 너무 진지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 강자와 약자의 권력의 불균형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덜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여유로움과 거리감은, "더 사랑하는 쪽"에는 언제나 상처가 된다. 모든 사랑의 저울은 불균형이 있기 마련이고, 노력없이 갑자기 점하게된 사랑의 우위 위에서 우리는 곧잘 우쭐해진다. 누군가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불현듯 나의 권력은 당연해진다. 권력이 당연하게 여겨질때 이를 휘두르고 싶어지는 인간의 잔인한 충동은, 역지사지의 이성으로는 억누르기 힘든 하나의 본능일지 모르겠다.

05. 인생의 베일
이 책의 백미는, 이제 스스로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여정에서 돌아온 키티가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한번 스스로에게 처절히 실패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일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은 한계에 대한 작가의 조소가, 어찌 보면 결국 인간은 절대 인생의 베일을 벗겨낼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인생을 다 알 것 같은 기분에 방심할때, 우리는 이런 "현타"의 구덩이에 다시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에 키티가 내린 결정처럼, 우리는 그 구덩이에서 또다시 네 발로 기어나와, 길을 묵묵히 걸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동 틀 무렵 모든 것을 끌어안는 대자연의 커다란 태양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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